▣ 김창석 한겨레 교육서비스본부kimcs@hani.co.kr
나는 아들이 태어난 2001년에 육아휴직을 했다. 그것도 두 달밖에 하지 않았다. 물론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을 모두 하는, 그야말로 진짜배기 전업주부의 일이었기 때문에 나름의 진정성이 있었다고 자부하지만, 아이를 낳은 여성들이라면 다 겪는 일을 했는데도 특별한 대접을 받은 것은 순전히 내가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그 일로 방송 출연도 했고, 몇 번 글도 썼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방송작가들의 전화를 받는다. “육아휴직을 하셨던 분으로서 아이 양육에 관한 특별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난 3초 동안 고민을 한 뒤 이렇게 말한다. “제가 그런 인터뷰에 응하면 진짜 사기꾼이 됩니다. 죄송합니다.”
어쨌든 그 당시에 난 남성 육아휴직의 선구자인 양 행동하고 발언했다. 그래서 그 육아휴직 경험을 쓴 기사를 통해서는 남성 육아휴직을 가로막는 법과 제도, 의식의 변화가 시급하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리고 그 뒤에 실제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당시에는 육아휴직을 해도 국가에서 나오는 지원비가 전혀 없었다. 지금은 몇십만원 정도의 지원비가 나온다. 남성 육아휴직자도 수백 명 단위를 넘어섰다고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흐름을 이끄는 데 조그마한 기여라도 했다는 자부심이 마음속에 있었다.
그런데 세종대왕이 남성 육아휴직에 관한 선구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세종이 스물아홉 살이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당시 궁중에서 일하는 노비가 해산을 하면 휴가로 열흘을 줬다. 인본주의자 세종이 흥분했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지시를 내린다. “노비도 사람이니 애를 낳은 뒤 100일을 쉬게 하고 애를 낳기 전 한 달을 쉬게 하라.” 산전·산후 유급 휴가 제도를 만든 것이다. 4년 뒤에 세종은 남성 육아휴직까지 만들었다. “아이를 낳은 산모는 중환자이니 그 남편도 휴가를 받아서 산모를 간호해야 한다.” 한 달간의 남성 육아휴직 제도가 600년 전에 있었으니 대한민국은 여태껏 조선 초기보다 못한 후진적인 제도 속에서 지내고 있었던 셈이다.
내가 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그런 역사적 사실에 무지했을 것이다. 과 같은 고전이 좋은 이유는 인간 역사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을 읽어서 어디다 써먹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는 이들은 고전이 주는 통찰력을 보지 못한다. 고전 읽기를 권장하는 전문가들은 “고전 읽기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길러져 나오는 지혜의 샘”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냥 입에 발린 말이 아니다. 불교와 도교, 기독교의 원전들이나 동서양의 설화와 민담, 그리고 그것에 기초한 스토리 구성이 블록버스터 영화의 기초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여태껏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 달려오느라고 고전 읽기의 중요성이 사회적으로 강조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고전 읽기의 수요가 늘어날 것이다.
품격 높은 글쓰기, 통찰력 있는 글쓰기는 고급 콘텐츠 읽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고전이 고전이 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인생 기출 문제집’인 고전을 글의 기본 질료로 삼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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