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권위자 말도 되씹어보라

등록 2007-12-07 00:00 수정 2020-05-03 04:25

▣ 김창석 한겨레 교육서비스본부kimcs@hani.co.kr

“금강산은 조선의 명산입니다.” 금강산의 일부 바위에 새겨져 있는 문구다. 텔레비전을 통해 그 문장을 보았을 때를 기억한다. 문장 아래에 그 말을 한 사람의 이름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 그가 지닌 권위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테제화되어 기록됐기 때문에 이런 ‘평범한’ 얘기를 무슨 대단한 의미가 들어 있는 것처럼 새겨놓지 않았을까.

만약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설득하는 글을 쓴다고 가정해보자. 아름답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서 위의 문장과 그것을 말한 사람의 이름까지 같이 소개한다면 그 주장에 설득력이 실릴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대한민국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논리적인 글쓰기에서는 논증의 과정이 필수적인데 그 가운데 ‘권위에 근거한 논증법’이라는 게 있다. 권위 있는 인물의 얘기를 인용하거나, 권위 있는 정보원에서 나온 정보를 인용함으로써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는 방법이다.

권위에 근거한 논증에도 몇 가지 방법론이 있다. 먼저 너무 일반론적인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 교육학자 페스탈로치가 “인류의 미래는 아동의 교육에 달려 있다”는 얘기를 했다거나, 김구 선생이 “남북이 분단되어서는 민족의 미래가 없다”는 말을 했다거나, 워런 버핏이 “주식 투자에는 신중함이 요구된다”는 말을 했다거나,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배드민턴은 건강에 아주 좋다”는 말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얘기는 아무리 인용해도 설득에 도움이 안 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항상 구체적인 현실에서 나오고, 논리적인 글의 주제도 대부분 구체적인 사안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두루뭉수리로 얘기한다면 어떤 세계적인 권위자의 말이라도 설득력을 지닐 수 없다.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얘기하려면 적어도 세계의 명산들을 두루 섭렵한 등산 전문가의 분석적인 평가 정도는 돼야 한다는 얘기다.

관련이 없거나 관련성이 떨어지는 내용을 인용해도 효과는 반감된다고 할 수 있다. 또 너무 추상적이거나 전문적이어서 보통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할 얘기를 쓰는 것도 좋지 않다. ‘지적 오만’이거나 ‘자기 만족’으로 쓴 글로는 많은 이들과 소통하기 힘들다. 많은 이들이 읽을 글이거나, 시험에 쓰일 글이라면 더욱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권위에 기대는 이유는 시쳇말로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권위자의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잘못된 인용은 역효과를 낸다. 자칫 자기 생각은 없이 남의 생각만을 좇는 인물로 보일 수도 있다. 권위 있는 말·글을 논증에 활용할 때 중요한 원칙은 ‘아무리 권위자의 말이라 하더라도 글쓴이의 생각이라는 깔때기를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자기 속에서 되새김질해본 생각과 그렇지 않은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단순한 발췌와 인용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고민을 통해 ‘원본’을 재구성하거나 재창조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식의 현란함’보다는 ‘생각의 깊이와 폭’을 보여주는 글이 좋은 글이다. 소박한 내용이라도 자기 식의 해석이 돋보이면 자연스럽게 주목을 받게 된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