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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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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老), 계(戒)

등록 2007-11-23 00:00 수정 2020-05-03 04:25

▣ 백은하 〈매거진t〉 편집장


당신도 세월을 피해갈 수는 없었군요. 를 보고 극장 문을 나서는 길, 누군가는 애크러배틱에 가까운 섹스신에 감동했을 테고, 누군가는 탕웨이의 은근한 매력에 넋을 잃었겠지만, 내 머리 속은 온통 량차오웨이(양조위)의 얼굴뿐이었다. 그는 많이 늙어 있었다. 이 마흔여섯 남자의 얼굴에 더해진 주름들과 입가에 파인 골은 그 자체로 한 배우가 살아온 삶의 등고선이었다. 하지만 늘어난 주름 위에는 공평히 그 나이에 걸맞은 품위와 연륜도 더해져 있었다. 그것은 미숙한 어린 남자들이 따라 하려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중년 남자만의 아름다움이었다. 과거의 량차오웨이와 지금의 량차오웨이가 평행 우주에서 마주친다 해도 젊은 량차오웨이가 되레 질투 어린 시선을 보낼 정도로. 그는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예쁘다’.


지금 이 순간이 ‘예쁘다’

주말을 지나 노트북을 여니 외국 여행에서 돌아온 어떤 여배우에 관한 보도자료가 도착해 있다.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20대 같은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는 10년 전 혹은 20년 전과 다름없는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진 속의 여자는 여전히 길을 걷다 마주치면 목이 돌아갈 만큼 아름다웠고, 그 탄탄한 복근은 꾸준한 노력 없이는 만들어지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쩐지 힘겨워 보였다. ‘엉뚱한 쌩얼’이라는 타이틀 아래 한껏 뺨을 부풀린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은 피로해 보였다. 그녀에게는 여전한 미모와 복근이 있었지만, 그 나이에 걸맞은 품위와 생기는 없었다. 현대 의학의 혜택을 입어 주름 하나 없는 이 여배우의 얼굴엔 그녀가 힘겹게, 혹은 즐겁게 통과해왔을 지난 과거는 사라지고 없었다.

드라마 의 말대로 사람이 ‘예쁘다’는 건 그저 외모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최근 일본 여배우 아오이 유우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사진집을 보면서 “아 예쁘다, 너무 예쁘다”라는 말이 연방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한국의 미녀 배우들에 비하면 그다지 미인도 아닌 이 소녀가 왜 이렇게 예쁘게 느껴질까 생각해봤더니, 그건 그 나이가 가지는 미숙함, 풋풋함을 거부하지 않고 건강하게 드러내고 있어서였다. 일부러 어른스러운 척, 섹시한 척, 혹은 4차원인 척하지 않는 그녀의 투명한 태도가, 화장기 없는 얼굴로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는 아오이 유우의 얼굴이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예쁘다’.

물론 늙어간다는 것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갓을 씌우지 않은 전등은 딱 질색이에요”라며, 환한 불빛 아래선 차마 늙은 얼굴을 내보이기 싫어했던 의 블랑시처럼 점점 현재의 자신을 숨기고 값비싼 가면만을 덧대려고 한다면 그 삶은 어쩐지 서글프다.

5년 뒤에는 어떻게 변할까

62년생 량차오웨이와 85년생 아오이 유우가 가진 아름다움은 각각 다르지만 또 같다. 그것은 바로 생물학적인 나이를 거부하거나 거스르지 않고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낼 줄 아는 현명함이다. 기회도, 행운도, 부도, 명예도 모든 것이 불공평하게 내려진 이 세상에 가장 공평한 사실 하나. 모든 인간은 늙는다는 것이다. “5년 뒤에도 변치 않을” 얼굴을 위해 오늘을 버리기보다는, 5년 뒤에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를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내야 한다. 세월과 노화라는 거대한 파도에 대항해 지금도 많은 인간들이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안다. 결국엔 인간이 지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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