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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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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

등록 2007-08-31 00:00 수정 2020-05-03 04:25

▣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지난 8월21일 에 ‘재밌는’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본지, 투표 결과 맞혔다’라는 제목의 기사였는데, 신문은 “국내 언론 가운데 유일하게 공식 개표 이전에 이명박 후보가 선출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보도했다”고 전했습니다. 이런 보도가 여론조사팀의 한발 앞선 조사의 성과라는 자랑도 덧붙었습니다.
이 신문은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개표일인 8월20일 ‘이명박 당선 유력, 박근혜 선전’이라는 기사를 통해, “한나라당 선거인단과 일반 유권자 3683명을 대상으로 시뮬레이션을 한 결과 이 후보 52.0%, 박 후보 45.0%로 7.0%포인트 차이인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보도한 것을 염두에 둔 듯합니다.
‘이명박 당선 유력’이라고 했으니, 정말로 ‘맞힌’ 걸까요? 한 꺼풀만 벗겨보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신문은 두 후보의 표 차이가 허용 오차범위 ±2.1%포인트 안에서 8천~1만5천 표가량일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2452표 차이로 나타났습니다. 그야말로 박빙인 1.5%포인트 승리입니다. 오차범위 최대치(4.2%포인트)를 적용한다 쳐도 예상 바깥의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이를 엄정히 따진다면 ‘면구스럽다’는 게 많은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해석입니다.
특정 언론의 지난 보도를 들춘 건 굳이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뜻은 아닙니다. 한국 정치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여론조사라는 존재를 이참에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물론 당원·대의원·국민 선거인단의 투표 결과를 뒤집고 이명박 후보를 당선시킨 국민 여론조사의 ‘힘’이 성찰의 주된 계기겠지요.
2007년 한국 정치에서 여론조사는 확실한 유행입니다. 민주노동당을 뺀 각 정당은 대선 후보 선출에 ‘민심’을 반영하는 것이 대의(大義)요, 대선 승리를 위한 합리적 선택이라고 여기는 듯합니다. 이런 탓에 일부에서 거론하는 여론조사 위험론이나 무용론은 그다지 설 자리가 없어 보입니다. 민주주의가 궤도에 오른 거의 모든 나라에서 여론조사가 대통령(혹은 총리) 후보 선출 제도로 이용되는 경우가 없다는 사실은 지금 시점에선 그저 남의 얘기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여론조사가 봇물을 이루고, 그 기세가 거세질수록 이 ‘과학’의 방법론적 오류 가능성과 결과의 자의적 해석, 교묘한 정치적 활용 등에 대한 우려감은 커집니다. 민심을 담아낼 가장 이상적인 그릇으로 여겨지지만, 정작 현실은 이상과 괴리가 적지 않아 보입니다.
여론조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애써 유행을 거부하겠다는 심사가 아니라면, 여론조사의 허와 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현명한 길일 듯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여론조사만큼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도 드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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