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항 발행인
사람들은 내 딸이 여느 아이들과는 다른 사회의식을 가졌을 거라 짐작하곤 한다. 조금 익살스럽게 말해서, ‘좌파’인 그의 아비가 필시 날마다 아이를 붙들고 사회의식을 주입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딸과 산 십수 년 동안 사회의식을 주입하기는커녕 사회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눈 기억도 거의 없다. 그건 내가 대개의 사회문제라는 것들이 아이들과는 무관한 세계의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떨결에 얘기한 계급
이를테면 미국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는 아이들과는 무관한, 어른들이 감당하고 책임지는 세계의 일이다. 아이의 세계는 동무들과 선생님과 이웃과 동네 사람들과 가족들로 이루어진 작은 세계다. 그리고 그 작은 세계에도 미국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가 존재한다. 그게 아이들의 사회문제다. 나는 진보적이고 양식 있는 부모 덕에 어른들의 사회문제에 상당한 지식을 가진 아이가 정작 제 세계에서의 사회문제에 대해선 빤질빤질 무의식으로 일관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아왔다.
그건 ‘모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신앙심이 더 적더라’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신앙은 주입되는 게 아니라 제 안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과정을 통해 생겨나는 것인데 어릴 적부터 신앙심을 강요받게 되면 신앙심의 껍질들(성경이나 교리 지식 따위)은 늘어나지만 자발적인 신앙심에선 멀어지는 것이다. 사회의식도 마찬가지다. 아이에게 어른 세계의 사회의식을 심어주는 일은 부질없는 일을 넘어 위험한 일이기 십상이다.
딸은 올해 중학생이 되었다. 인생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바뀌는 게 어느 밤 자정이 아니라면 그는 이제 아이의 세계를 떠나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는 꽤 긴 여정에 접어든 셈이다. 달리 말해서 그는 어른 세계의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만한 나이가 되었다. 관심은 조금씩 감당과 책임으로 변화해갈 것이고 나는 그에 걸맞게 그와 소통해갈 것이다. 안 그래도 그는 부쩍 사회문제에 대해 말을 걸어오는 일이 늘었고 주제 또한 시사의 속도와 비슷해지고 있다. 몇 주 전 대화.
“아빠, 에프티에이가 나쁜 거지?” “어떤 사람에겐 좋고 어떤 사람에겐 나쁘지.” “농사짓는 사람들은 나쁘지?” “그렇지. 그 밖에도 아주 많지. 숫자로 따지면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지.” “그럼 우리나라 정부는 나쁜 정분가?” “그것도 마찬가지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정부나 모든 사람에게 나쁜 정부는 없어. 어떤 사람에겐 좋고 어떤 사람에겐 나쁘지.” “아빠는?” “아빠는… 네 생각엔 힘센 부자들 편에 서는 게 좋은 정부야,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는 게 좋은 정부야?”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는 정부.” “그럼 아주 나쁜 정부네. 아빠도 그렇게 생각해.”
별 생각 없이 그의 말에 끔벅끔벅 대꾸했을 뿐인데, 마치고 나서야 나는 그와 ‘계급 문제’에 대해 대화했음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나는 얼떨결에 그와, 전체 사회 성원에 공통된 선이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계급에겐 선이고 어떤 계급에겐 악일뿐이다, 국익이란 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이다, 따위 이야기를 한 것이다. ‘우리나라’ ‘우리 민족’이라는 말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아이가 세상이 민족이나 국가보다는 계급으로 나눠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건 ‘의식의 성인식’이라 할 수 있다. 성인식은 그런대로 잘 치러진 듯하다. 며칠 전.
의구심과 분노가 더 생길 때까지
“아빠, 일본 사람들 전체가 나쁜 거야?” “왜 물어보는데?” “애들이 막 그러잖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일본 정부가 나쁜 거지 일본 사람 전체가 나쁜 건 아니잖아?” “그렇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뿐이었어?” “나하고 또 한 명만.” “그래….” 그에게, 실은 네 동무들뿐 아니라 네 앞에서 어른 노릇을 하려 드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여전히 세상이 민족이나 국가로만 나뉜다고 믿는다, 그래서 지배계급에 늘 속고 뜯어먹히며 살아간다, 말해주려다 말았다. 그의 마음속에 사회에 대한 의구심이나 분노, 혹은 연민이 더 많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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