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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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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지도, 생명의 지도

등록 2007-03-01 00:00 수정 2020-05-03 04:24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이 글을 쓰는 동안 위성방송 ‘채널4’에선 (미국의 인기 토크쇼인) 가 흘러나오고 있다. 오늘의 주제는 과도한 개인 부채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초대손님으로 나온 전문가는 객석을 가득 메운 과도한 쇼핑을 한 것으로 보이는 여성들에게, 명품 의류 구매를 줄일 것을 조언하고 있다. 그들이 늘어나는 수입과 재산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에서는 사브리나 알 자나비의 사연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라크 경찰들이 집에 있던 그를 어떻게 납치했고, 성폭행했는지에 대해서….”
이라크의 대표적 블로그로 꼽히는 ‘바그다드 버닝’에 지난 2월20일 올라온 글 가운데 일부다. 하루도 예외 없이 이어지는 이라크 유혈사태를 전하는 외신들의 보도는 언제나 똑같아 보인다. 매일 수십, 수백 명씩 죽어나가는 현실에 점차 무뎌지다가도, 평범한 이라크인들이 블로그에 올리는 글을 볼 때면 이라크의 참담한 현실에 새삼 몸을 떨게 된다.
분쟁지역에서 첨단기술은 때로 의도치 않은 용도로 쓰인다. 영국 〈BBC〉에서 최근 전한 검색 사이트 구글에 얽힌 사연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방송은 지난 2월13일 “구글의 온라인 위성지도 서비스인 구글어스가 종족 간 유혈사태의 수렁에 빠진 이라크인들에게 유용한 생존전략 수단이 되고 있다”며 “구글어스의 위성사진을 이용해 자신이 사는 지역 일대의 조밀한 지도를 준비해둔 뒤, 유혈사태가 벌어지면 어떤 경로로 현장을 빠져나갈지 미리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전했다.
악화일로를 치닫는 종족 간 폭력의 악순환은 죽음의 잔혹극을 피하기 위한 조언을 해주는 인터넷 사이트까지 등장시켰다. 〈BBC〉가 전한 이 사이트들이 내놓은 조언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먼저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책은 무장세력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일단 붙잡히면 살해되거나 고문을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매일 이동경로를 바꾸는 건 기본이다. 무장세력도 ‘목표물’의 움직임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수니파는 시아파 이름으로 된, 시아파는 수니파 이름으로 된 별도의 신분증을 만드는 건 필수사항이 된 지 이미 오래다. 어떤 식으로든 종파를 식별할 수 있는 흔적은 지워내야 한다. 물론 정반대의 조언도 있다. 이를테면 시아파 무장세력이 들이닥칠 때를 대비해, 수니파도 (시아파가 존경해 마지않는) 아야톨라 알리 시스타니의 사진이나 이맘 후세인의 영정쯤은 준비해둘 필요가 있다는 게다. 삶이 삶이 아닌 땅, 이라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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