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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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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마을 킬러들의 수다

등록 2006-12-29 00:00 수정 2020-05-03 04:24

▣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여러 지자체에서 ‘영어마을’로 계속 야단법석이더니, 12월14일 정부는 초등학교 1, 2학년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6천여 유휴 교실에 원어민을 배치하며, 제주도에 115만 평 영어 전용 타운을 만들어 초등부터 대학까지 영어로 교육하고 제주 국제자유도시에서 영어 몰입 교육을 하며, 외국 교육기관 설립 규제를 완화해 모든 지자체에 세우겠다고 했다. 참으로 희귀하게 여야, 좌우, 동서, 빈부, 남녀노소 관계없이 환영하는 눈치이다. 단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고 한 ‘공룡파’는 이 정권은 역시 무능하니 죽어야 한다 하고, “영어의 바다에 빠지자”라고 했던 ‘바다파’는 차라리 제주도 영어 바다에 빠져 죽자고 할지도 모르겠다.

명교수와 멍교수의 차이

독일에서는 영어를 ‘킬러언어’라고도 한다. 영어를 살인언어, 테러언어, 지배언어, 식민언어, 제국언어이라고도 한다. 그 킬러들의 수다는 시끄럽다. 영어는 세계 첨단·최고·최대의 세계어·국제어·지구어이고, 영어를 모르면 교양인·지식인은커녕 낙오자라느니, 책으로 배우는 영어는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니 최소한 원어민에게 배워야 한다느니 등등. 이런 수다에서 저 영어마을, 영어타운이 나왔으리라.

어디 그뿐인가? 우리의 영어열은 가히 킬러적, 필사적이다. 모든 TV·라디오가 영어회화 방송으로 하루를 시작해 진종일 영어회화로 전국이 끓는다. TV의 미국 드라마나 영화는 옛날부터 끊이지 않았고 그것도 세계명작이니 세계명화라는 이름으로 수십 년째 ‘롱런’이다. 한국 드라마에도 백인이나 백인 혼혈이 심심찮게 나와 유창한 영어로 인기를 끌고 광고에도 등장하지만, 이른바 ‘유색인’은 연초에 한 번 외국인 노래자랑에서 어색한 한국어로 우리를 웃길 뿐이다. TV에 나오는 한국인이야 모두 4천만 명 중의 유명 스타지만 백인은 영어하는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뽑힌다. 다른 백인도 한국에서 최소한 교사, 교수 또는 배우로 출세하는데 그 수도 이제 대폭 늘린다고 한다. 그보다 훨씬 많은 나 같은 원주민이나 과거 원주민이었던 유색인 3D 업종 노동자는 노예처럼 사는데도 말이다. 아, 위대한 원어민!

어디 그뿐인가? 가정집과 백화점에는 영어 이름의 상품으로 넘쳐나고 거리·아파트도 영어 간판이나 이름으로 그득하다. 대학은 오로지 영어뿐이고 특히 토익이 지배한다. 이제는 영어로 강의하면 명교수, 못하면 ‘멍교수’다. 전국 대학생이 토익 신도이고 공부란 토익뿐이며 도서관에서도 토익 책만 본다. 온종일 귀에 꽂는 MP3는 영어 노래(한국 노래도 이젠 영어판이다)뿐이고, 눈으로 보는 영화나 DVD도 미국 영화뿐이다. 미국 노래도 영화도 영어 이름 그대로 쓰지 우리 말로 번역하면 촌스럽다. 특히 스포츠·연예계·컴퓨터언어는 모조리 영어다. 청춘들 세계는 더더욱 그렇다. 그야말로 “우리의 소원은 영어” “우리의 종교는 영어”, 그것도 절대 숭배의 광신 상태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영어 신화가 진실이고, 영어 미신이 신앙이다.

영어 숭배는 백인 숭배

영어 신화의 신은 백인 킬러로 다른 모든 민족과 나라와 언어를 파괴한다. 킬러는 한때 영국·프랑스였으나 지금은 미국이다. 현재 5천 개인 언어가 격주로 하나씩 없어져 얼마 뒤에는 영어 하나만 남을지 모른다. 킬러는 인권으로서 언어권, 문화권, 정보권을 박탈하고, 언어 민주주의를 파괴하며, 결국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없애버린다. 그래서 세상이 오로지 미국 문화 하나로 된다는 게 바로 세계화다. 그것을 낳는 것이 영어 교육, 특히 조기 영어 교육이다. 조기 교육이 효과적이라는 신화는 전혀 근거가 없는데도 무식한 광신도 관료나 지식인들이라는 킬러의 노예에 의해 선전된다. 도리어 조기 교육은 조기 노예화에 특효이다. 그 노예는 스스로 주인인 백인 킬러에게 열심히 복종하고 백인처럼 행세하다가 결국은 자신을 백인으로 착각한다. 영어 숭배는 백인 숭배다. 유색인은 자신을 포함한 비백인 멸시라는 인종 차별 의식으로 자기 부정에 빠진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말, 우리 문화, 우리 역사를 부정하고, 영어와 미국 문화가 아닌 다른 언어와 문화를 무시한다. 영어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이런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등해야 한다. 킬러들의 수다로 야단법석인 영어마을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 한다. 이를 자유무역협정(FTA)이나 미군기지, 심지어 통일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고 느끼는 것은 내가 시골 무지렁이 원주민이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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