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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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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해치우기

등록 2006-10-14 00:00 수정 2020-05-03 04:24

▣ 조영아 소설가· 지은이

드디어 해치웠다. 긴 연휴가 끝난 뒤 이 집 저 집에서 새어나오는 주부들의 탄식이다. 명절이 지나고 나면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심신이 황폐해진다. 몸은 여기저기 쑤시고 결리고 긴장이 풀어진 마음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린다. 올해같이 긴 연휴에는 상황이 좀더 심각하다. 연휴가 시작되자 인천공항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연인이나 가족들과 이 대열에 합류한 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일상을 떠받치고 있는, 해외여행은커녕 근교 나들이도 꿈꿀 수 없는 평범한 주부들에게는 이 길고 긴 황금연휴가 더없는 고역이었을 것이다.

내 평생 저런 날은 오지 않으리

주부들에게 명절은 ‘쇠는 것’이 아니라 ‘해치우는 것’이다. 명절이 왜 ‘해치우는 것’으로 전락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은 없을 듯. 내 경우 명절 한 달 전부터 신경이 쓰인다. 연이은 달력의 빨간 글자만 봐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명치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혀 있는 느낌이다.

날짜가 점점 다가올수록 그 돌덩이의 무게는 차츰 더해진다. 일을 해도 손에 잡히지 않고 책을 봐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무슨 몹쓸 날을 받아놓은 사람처럼 초조하고 괜히 마음만 바쁘다. 명절 일주일 전부터 드디어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고달픈 하루하루가 이어진다. 그날이 다가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소화가 안 되고 잠이 안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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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팔자가 좋아서 명절 때 놀러가고. 텔레비전에 비쳐지는 인천공항의 행렬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내 평생 저런 날은 오지 않으리라. 나와는 멀고 먼 이야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이나 하지 말 것을. 모든 화살은 ‘결혼’이라는 굴레로 향한다.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시집도 없었을 거고 그 틈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명절 때 그 많은 음식 준비며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바리바리 싸들고 고난의 대장정에 오를 필요도 없을 터이다. ‘풍성하고 넉넉한 명절’을 위해 주부들은 며느리, 아내,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공식적·합법적으로 혹사되고 착취된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거부한다. 오로지 일만 하는 기계다. 도대체 명절이 뭐기에. 육체적·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황폐해진다. 어디다 대고 하소연할 데도 없다. “너만 며느리니? 너만 명절 쇠니?” 단박에 그런 화살이 돌아와 박힌다. 말도 못하고 내색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는다.

명절이 지나고 연휴가 끝나도 앙금이 계속 남는다. 더 심각한 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이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명절 후유증 때문에 병원 앞을 기웃거리는 주부들이 있을 게다. 설을 쇠고 난 2월이 1년 중 이혼율이 가장 높은 때라는 통계만 보더라도 명절 후유증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다. 명절 전의 심리적 부담감과 지내고 난 뒤의 후유증, 이 둘을 번갈아 겪다 보면 어느새 1년이 다 간다. 그러니 명절이 부담스럽고 고된 천덕꾸러기일 수밖에. 여자가 결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감당해야 하는 무게가 어디 이뿐이랴마는 그중에 가장 큰 고역이라 할 만하다.

보름달이 찰수록 스트레스도 차오르고

추석 때 한 번도 달을 올려다본 적이 없다. 올해도 역시 달을 보지 못했다.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뜻일 게다. 둥근 보름달 아래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으며 담소를 나누는 그림이 사실 그리 정겹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주부들의 불면증과 소화불량과 우울증이 숨어 있는지를 알고 나면 그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보름달을 보름달로 보지 못하는 마음이 아쉽다. 주부만 힘들고 고된 건 아니다. 어느 누가 편하기만 하겠는가. 그러나 그중에 으뜸은 단연코 주부다. 보름달이 차오를수록 주부들의 스트레스도 차오른다는, 아내 대신 가사를 전담하는 어느 남자의 푸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는 생물학적 성을 떠나 ‘주부’라는 자리가 떠안는 불합리하고 부당한 역할이 얼마나 큰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주부들이 바라는 건 해외여행이 아니라 주위의 작은 배려다. 넉넉하고 풍성한 보름달처럼 주부들의 마음도 넉넉하고 풍성해지는 명절이 그립다. 주부들만을 위한 하루, 그날 밥하고 설거지하면 법적으로 처벌받는, 웃기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는 그런 하루, 그런 명절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1년에 딱 하루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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