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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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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질에 관한 명상

등록 2006-09-02 00:00 수정 2020-05-03 04:24

▣ 고경태 편집장 k21@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K-2 소총을 구했습니다.
물론 가짜입니다. 표지 사진의 현실감을 높이기 위해 영화 소품 가게에서 돈 주고 빌렸습니다. 모델의 손에 들린 소총은 전쟁의 긴장감을 살려줍니다. 그런데 반론에 부닥쳤습니다. 총보다는 삽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결국 삽 한 자루도 추가로 빌려보았습니다.
모델은 총을 들기도 했고, 삽을 들기도 했습니다. 표지 사진으로는 무엇이 더 적당할까요. 취재에 함께 참여했던 인턴 기자 이혜민·김민경씨는 ‘삽’을 밀었습니다. 병사들이 주로 ‘삽질’을 하고 왔다는 겁니다. 깎아내리려는 게 아닙니다. 병사들이 가장 많이 한 일은 분명히 ‘삽질’이었습니다. 막사를 짓느라, 주둔지를 보수하느라, 방어진지를 구축할 모래주머니를 만드느라 병사들은 지루한 삽질을 해야 했습니다.
이라크 파병의 명분은 ‘전후 이라크 재건·복구’였습니다. 따라서 ‘총질’은 전혀 안 하고 ‘삽질’ 위주로 일상을 보냈다는 건 칭찬받아야 합니다. 문제는 재건·복구를 위한 삽질이 몇%나 됐느냐는 겁니다. 자이툰부대가 실제 이라크 재건 지원을 위해 쓴 예산은 주둔 자체 비용의 10분의 1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병사들을 이라크에 보낸 것일까요. 에르빌 막사 안에 가둬놓고 삽질 시키는 게 목적이었습니까?

은 그동안 이라크 전쟁과 한국군 파병에 대해 비난을 퍼부어왔습니다. 단적으로 2003년 9월25일치(476호) 표지 제목은 지금 돌이켜봐도 원색적입니다. “파병은 미친 짓이다.” 3년이 흘렀습니다. 은 자이툰에 다녀온 예비역 장교·사병 120여명과 접촉했습니다. 30명은 직접 만났고, 나머지는 전화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표지모델로 등장한 예비역 사병도 그중의 한 명입니다. 은 이를 토대로 파병의 공과를 냉정하게 분석·평가해보았습니다. 결론은 역시 ‘삽질’이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얻은 게 없는 노무현 정권의 ‘허망한 삽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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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과 삽을 꺼내놓고 보니, 끔찍한 전쟁 이야기 한 토막이 떠오릅니다. 6년 전 해병 출신의 베트남 참전군인에게 들었던 고백입니다. 그는 참전기간이던 67년 2월의 어느 날, 체포된 베트콩 용의자를 처치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은 뒤 주둔지 외곽으로 끌고 갔다고 합니다. 소대원들과 함께 총과 삽을 들고 말입니다. 베트콩 용의자에게 삽으로 무덤을 직접 파게 한 뒤에 이렇게 옥신각신했다지요. “총으로 쏴죽일까? 아니야. 에이, 총알 아까운데 삽으로 때려죽일까?” 그는 결국 총으로 몹쓸 짓을 했다고 합니다.

자이툰에선 계속 평화로운 삽질만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삽질조차 2006년 12월31일까지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국회가 다시 파병연장안에 동의해준다면 그거야말로 ‘의원들의 삽질’로 기록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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