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영 기자/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kimmy@hani.co.kr
새로 만들어진 누리꾼 말을 몰라서 깔때기로 얻어맞는 게 한국방송 의 ‘올드 앤 뉴’에서만은 아니다. ‘된장녀’ ‘쌩얼’ ‘직찍’ 등 새 말 따라잡기가 바쁘다. 이런 새 말들은 기본적인 조음 규칙을 무시하지만, 이것들은 새로운 사회적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번엔 ‘현피’라는 말이 등장했다.
‘현실’의 앞글자 ‘현’과 PK(Player Kill)의 앞글자 ‘P’(피)의 합성어다. 온라인에서 같이 게임하던 사람을 직접 찾아가 폭력을 행사하거나 해코지를 하는 살벌한 말이다. 예를 들면, “누가 언제 현피하러 올까봐 마음 놓고 게임을 할 수 없다.”
‘설마 진짜?’가 ‘현실’에서 일어났다. 지난 8월14일 인터넷 사이트에서 시비가 붙은 고교생 2명이 강남역 인근에서 만나 10여 명의 누리꾼이 지켜보는 가운데 난투극을 벌였다. 말 그대로 현피다.
주인공은 지난 13일 오후 패션갤러리 게시판에서 옷을 흥정하다 말싸움을 벌이던 중 주변 누리꾼들이 “그러지 말고 진짜 만나서 제대로 싸우라”며 폭력을 조장하자, 실제로 현피에 응한 것이다.
이 둘은 우발적 폭력을 반성하고 서로 화해하긴 했지만, 문제는 ‘싸움을 조장하는 사회’에 있다. 두 사람의 다툼을 지켜본 누리꾼들은 오히려 “현피 장소에 가서 인증 사진을 찍어올 테니 보고 싶은 사람은 메일 주소를 남기라”고 부추기거나 직접 현장을 방문했다. 몇몇 누리꾼은 “둘이 합의하에 싸웠는데 뭐가 문제냐?” “학창 시절 맞짱 한 번쯤 떠보지 않은 남자 누가 있나?”며 현피 옹호론을 편다. 한 누리꾼은 “(싸움에) 지면 게시판을 떠나야 한다”는 자극적 문구의 홍보 ‘포스터’를 제작, 배포하기도 했다.
현피가 있은 다음날인 15일 해당 사이트는 접속장애가 발생할 정도로 현장 사진과 글이 급속하게 퍼졌다. 포털 사이트에서 ‘현피’가 실시간 검색순위 상위에 올랐음은 물론이다. 다수의 누리꾼은 “아무리 사이버상에서 감정이 격해졌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만나서 결투를 벌이는 것은 무모한 일”(네티즌)이라며 “제정신 차려요”(mj9050)라고 꼬집었다.
현피는 인터넷이 낳은 변형된 폭력 가운데 하나다. 익명의 다수가 사용하는 인터넷이 군중심리를 자극해 개인의 도덕성마저 무감각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일종의 경고성 메시지다. 민경배 사이버문화연구소장은 “인터넷 채팅을 통해 번개를 하는 것처럼, 현피 역시 그동안 암암리에 행해져왔을 것”이라며 “더 큰 문제는 현피의 당사자가 아니라 폭력을 조장하는 주변 사람들과 사건을 확대 해석하려는 우리 사회에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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