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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만든 국화 | 정재승

등록 2006-02-17 00:00 수정 2020-05-03 04:24

▣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바이오시스템학과


2000년 2월,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얘기다. 미국으로 공부하러 간 지 얼마 안 돼 한국에서 친구들이 놀러왔다. 내가 있던 곳은 조그마한 시골도시라서 3일이면 지루해지기에도 긴 시간이었던지, 친구들이 주말에 뉴욕으로 놀러가자고 떼를 썼다. 첫 뉴욕 나들이라 헤매기도 많이 헤맸지만, 물어물어 도착한 곳은 현대미술의 중심지이자 든든한 후원자인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과연 최고의 현대미술관에선 어떤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을까? 떨리는 가슴으로 행사 플래카드 앞에 섰다.

과학자라면 더 놀라는 백남준의 세계

이곳에선 며칠 전부터 ‘백남준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그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뉴욕 맨해튼까지 와서 한국 사람의 작품을 봐야겠냐며 허탈해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미술관으로 들어선 뒤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두운 공간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는 수많은 TV 화면과 비디오 영상들. 우리가 언제 백남준 선생의 작품을 꼼꼼히 챙겨본 적이 있었던가? 그의 가족사를 들먹이며 못마땅해하다가 세계가 그를 인정하자 마지못해 그를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가?

그날 우리는 1만1천km나 떨어진 서울에서 날아와, ‘한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라고 표기된 백남준의 작품을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그를 대접’한 뉴욕에서 감상하는 기묘한 체험을 했다.

21세기적 인간이라면 누구나 백남준의 작품과 맞닥뜨리면 그 매력에 빠지게 되지만, 과학자들은 아마 더욱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백남준은 이 시대의 과학기술의 본질을 가장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그것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중에 <피라미드>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은 거대한 유리 피라미드 안에 초록색 레이저 빛들이 반사되고 굴절되면서 예술적 문양을 품어낸다. 레이저의 원리와 광학 법칙들이 정교하게 맞물린 이 작품은 한복의 색동저고리를 보면서 ‘분광기로 분리된 빛의 스펙트럼’을 떠올리는 백남준이 아니면 도저히 생각해내기 어려운 작품이다.

또 <자석 TV>(Magnet TV)는 어떤가? 어느 날 우연히 TV 위에 자석을 올려놓았다가 브라운관의 TV 화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는 이 현상에서 새로운 표현을 발견한 백남준은 TV 위에 거대한 말굽자석을 올려놓고 <자석 TV>라는 작품을 만들게 된다.

그의 작품에서 과학자들이 한 번 더 놀라는 것은 그가 만들어내는 비디오 영상에 세부구조가 같은 패턴으로 무수히 반복되면서 줄어드는 ‘프랙털 이미지’가 수없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자연과 인간이 역동적인 운동을 통해 만들어내는 고유한 패턴이 ‘프랙털’이라는 사실을 그는 이미 20년 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예술적 성취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인 과학기술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몸으로 맞닥뜨려 얻어낸 것이라는 점에서, ‘나는 수학과 과학에는 젬병’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인문학 우월주의’ ‘예술지상주의’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는 우리 시대 예술인들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백남준은 현대사회에서 TV와 비디오, 인터넷이 ‘정보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영향력과 본질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20세기 말이 되어서야 과학자나 정부 관료들이 사용하게 된 ‘초고속 정보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라는 단어도 이미 30년 전 백남준이 자신의 논문에서 만들어낸 걸 알게 되면, 우리 과학자들이 백남준에게 빚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콜라주 기법이 유화를 대체한 것처럼 TV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이 오늘날 들어맞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미 TV와 인터넷이 보여주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거대한 ‘인간 TV’가 돼버린 지 오래다. 백남준은 TV를 인간화된 예술에 대한 파괴자라고 믿었으며, <뉴욕타임스>의 말처럼 그는 ‘과학기술과 전자매체에 어떻게 인간성을 부여하느냐’를 끈질기게 추구했다. 그리고 지구라는 거대한 놀이터에서 마음껏 자신의 창조성과 장난기를 뿜어냈다.

지난 1월30일 백남준은 미국 마이애미에서 숨을 거뒀다. 죽고 나서야 슬피 우는 못난 자식처럼 이번에도 우리는 호들갑스럽게 그를 추모한다. 아마도 이 열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곧 사라질 것이며, 그의 미래적인 예술관은 사람들 머릿속에서 쉬이 잊혀질 것이기에 안타깝기만 하다. 우린 앞으로도 뉴욕에 가야만 그를 발견하고 추억할 수 있는 걸까?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TV로 만든 국화 한 다발’을 그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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