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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넌센스] ‘뿜빠이’하는 나라, 좋은 나라

등록 2005-12-08 00:00 수정 2020-05-02 04:24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연말이 다가온다. 연말은 나눔의 계절. 신용카드 회사도 ‘나누미 서비스’를 준비했다. 카드를 쓰면 기부금을 내는 기능? 그런 선심성, 아니 선행성 서비스는 아니다. 카드를 쓰고 ‘뿜빠이’를 하는 기능! 그러고 보면 카드의 결정적인 취약점은 ‘뿜빠이’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화투도 아닌 카드를 쓰고 ‘피’를 보는 사람이 생겼다. 나누미 서비스를 신청하면, 한 사람이 대표 결제를 해도 나중에 ‘뿜빠이’가 된다. 분담자의 이름과 금액을 입력하면 각자 부담이 된다. 이제 술기운에 뿜빠이하기로 했다가 다음날 맨정신으로 시치미 떼는 놈들을 응징할 수 있게 됐다(구 기자, 너 말이야!). 얼마나 아름다운 미풍양속과 첨단기술의 만남인가. 국어사전 용어로는 ‘각자 부담’, 아저씨들의 은어로는 ‘뿜빠이’, 히딩크식 영어 표현으로 ‘더치 페이’가 신용카드로도 실현된다니. 뭐라고요? 소급 적용은 안 되냐고요? 당신도 뿜빠이 미수금이 너무 많다고요?

제발 약값도 ‘뿜빠이’하자. 에이즈 약값 말이다. 아시다시피(저런, 모르셨습니까?), 12월1일은 세계 에이즈의 날이다. 물론 올해도 어김없이 에이즈 통계가 발표됐다. HIV/에이즈 감염인 4030만 명. 최초로 4천만 명을 넘어섰다. 날마다 1만여 명이 에이즈로 숨진다. 에이즈가 아니라 에이즈 약값 때문에 죽는다. 에이즈는 이제 관리 가능한 병. 약만 잘 먹으면 매직 존슨처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 그러나 하루 1달러 버는 아프리카의 감염인에게 하루 30달러씩 하는 에이즈 약은 그림의 떡이다. 그래도 미국에서 30달러 하는 약값도 인도에 오면 3달러로 내려간다. 다국적 제약회사가 지적 재산권만 포기하면 약값이 10분의 1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다국적 제약회사도, 미국도 약값 좀 뿜빠이하자. 미국, 에이즈 기금 좀 더 내란 말이다. 속담에 ‘병 주고 약 주고’라는 말이 있다. 미풍양속에 따라, 병을 줬으면 약을 달라! 약은 있는데, 약값이 없다. 그래서 사람이 죽는다니, 이건 정말 넌센스다.

시청률도 ‘뿜빠이’하자. 마침내 시청률 30%를 넘어 40%에 육박하는 국민 드라마가 사라졌다. <장밋빛 인생>이 끝나면서 브라운관에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시청률 30%를 넘는 드라마가 종적을 감추었다. 보기 좋다. 방송 3사의 드라마가 사이좋게 시청률을 나누는 모습이. 역시 연말인가 보다. 나는 국민 드라마는 무섭다. 드라마 안 보면 국민이 못 되는 나라는 무섭다. 절반이 넘는 국민이 같은 시간에 같은 드라마를 보는 나라, 흔치 않다. 시청률 50%를 넘기는 국민 드라마라니, 다른 나라에서 알면 웃는다. 우스워서 웃고, 무서워서 웃는다. 애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작금의 시국에, 그나마 국민 드라마라도 없어서 다행이다. ‘궁민’ 드라마 없는 나라, 애국자가 적은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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