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신명숙/ 작가
일주일에 한번씩 얼굴을 내밀던 TV 프로에서 물러난 뒤 사람들이 거의 예외없이 던지는 질문 하나. 지금은 뭐하세요?
뭘 하냐니, 하는 일이 어디 한둘인가? 책도 읽고, 동네 일에 참견도 하고, 오랫동안 간여해온 잡지 일로 불려다니기도 하고, 늙고 병든 엄마 수발도 하고, 가끔 운동도 하고, 밥상도 차리고… 꼽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이 몸도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꽤나 바쁘신 몸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도대체 뭐하고 있느냐’는 어쩐지 심문조의 질문을 들으면 나는 하고많은 ‘하는 일’ 중에서도 유독 ‘책 쓰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대답을 내놓곤 했다.
‘놀고’ 있지만 ‘느낄’수 있다
짐작하겠지만 오로지 그것만이 소득을 기대할 수 있는 일로 질문의 핵심을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 대한 반응은 영 신통치 않다. 내 동생만 해도 내가 몇번이나 책을 써서 돈 벌겠다고 얘기했건만 깡그리 무시하고 지금도 전화하면 ‘좋은 소식 없어?’ 하고 묻는데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주눅 든 백수가 돼버리고 만다. 돈이 권력이고 돈을 벌기 위해 모두가 미친 듯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백수란 사회의 낙오자요, 추방자와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백수 취급을 하건 말건 요즘 나는 그런대로 행복하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며, 아무 때나 하고 싶은 일을 한다. 내 시간의 주도권을 내가 쥐고 있다는 말이다. 마음에 드는 책을 읽다가 창밖의 새 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 때, 조용한 집안에서 향기로운 차 한잔으로 심신을 다스릴 때, 개발 논리에 훼손되는 우리 동네 환경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고 결의를 다질 때, 뜻을 같이하는 페미니스트 동지들과 함께 일을 꾸미며 자매애를 확인할 때, 늙은 엄마를 앞세워 산책길에 나설 때, 나는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돈을 벌지 못해 ‘놀고’ 있지만 온전한 내 시간을 ‘느낄’ 수 있다.
프랑스 사회민주주의 사상가이자 정치인이기도 했던 자크 아탈리는 최근 그가 꿈꾸는 인간적인 사회의 키워드로 ‘양질의 시간’이란 새로운 개념을 소개했다. 양질의 시간이란 삶의 의미가 있는 시간으로서 창조적이고 자유롭고 유용하며 우애의 방식으로 사용되는 시간이다. 반면 불량한 시간은 자유롭지 않고 강제되는 시간을 말한다. 정치의 주된 사명은 사람들이 최대한 양질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가능한 수단을 많이 제공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비전 속에서 시간은 돈이 아니라 의미이자 가치가 된다. 또 노동이 소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자발적인 것으로서 부와 즐거움을 함께 창조하는 것이 된다.
의미있는 “뭐하세요?”를 위하여
고용불안과 정글 같은 경쟁으로 직장인의 95%가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는 세계 최고의 ‘불량시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참으로 송구스런 얘기지만, 요즘의 내 시간은 적어도 불량한 시간은 아닌 것 같다. 대체로 자유롭게, 큰 불만 없이 보내고 있으니까. 밥상 차릴 때만 빼고.
이쯤에서 “당신이야 돈 벌어오는 남편이 있으니까 그렇지, 생계를 책임지는 남자들은 어쩌란 얘기야?” 하는 투덜거림이 있을 법한데, 그런 남자들에겐 세개의 선택지가 있다. 여자로 태어나지 못한 죄를 탓하거나, 아내가 일자리를 찾도록 이제부터라도 함께 노력하거나, 아니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인간의 힘을 믿고 우리 사회의 체제를 ‘남편 부럽지 않게’ 바꾸는 일에 나서는 것이다.
‘뭐하세요?’ 하는 질문이 상품화된 시간이 아니라 의미화된 시간과 연관되는 사회, 의료와 교육과 주택 등 기본적인 생활조건이 보장되고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개발하며 노동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그러면서도 시장의 활력은 잃지 않는 그런 사회는 정녕 유토피아에 그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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