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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적국(舟中敵國) | 박민규

등록 2005-05-26 00:00 수정 2020-05-03 04:24

▣ 박민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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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다. 이제는 정말 졌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든다. 홀가분하고, 외롭다. 아마 당신도 홀가분하고 외로울 것이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홀가분함, 나밖에 없다는 이 외로움. 그렇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을 ‘당신’이라 부르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신을 언제 본 것도 아니고, 또 볼 것도 아니니까. 그나저나 당신 나 알아?

졌다, 나는 그만 졌다

졌다. 이제는 정말 졌다는 생각이 든 것은, 지난 8일 광화문 광장에서였다. 내신등급제에 반대하는 400명의 아이들이- 무사히, 무사히 집회를 끝내고 집으로 발길을 돌리던 그 순간이었다. 집회의 성격이나 주최쪽의 정체성 여부를 떠나, 나를 놀라게 한 건 집회에 나오지 않은 수천 수만의 아이들이었다. 리플에 리리플로, 1분에 300타로, 나가자 모이자며 주변 수십명의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정작 자신은 참석하지 않은 수천 수만의 아이들이었다. 바로 우리의 미래였다. 이미 총성이 울린 지는 오래, 앞이 보이지 않아도 말들은 어떻게 달려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한국의 관료들을 바보라고 생각했다. 정치를 하는 인간들, 특히 교육제도를 만들고 관할하는 인간들에 대해 돌대가리가 분명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아뿔싸 그들이, 이토록 치밀하고 유능한 인재들이었다니. 20년 내신제가 만들어낸 한국 사회의 살풍경 앞에서 나는 그만 졌다, 라고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주중적국(舟中敵國). 적은 확실히 우리 안에 있었다. 왜 내가 너의 적이 되어야 하지? 한 배에 탔기 때문이야.

내신제는 더 이상 고교생들의 문제가 아니다. 학원을 전전하는 네다섯살 코흘리개에서부터, 학교와 직장에서 죽는 날까지 무한경쟁을 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선생님, 사는 게 왜 이렇죠? 한국 사회가 내신 사회이기 때문이야. 엄마, 오늘은 마이클 선생님과 날씨(weather)에 대해 스피킹했어요. 달려라, 달려. 힘들어요. 피차, 힘들긴 마찬가지야. 대학에, 그러니까 대학만 가면. 그래도 대학엘 왔으므로, 취업 걱정이라도 하는 거야. 안 그래? 말하자면 취업이 관건인데. 그건 그렇고 김 대리, 어디 출신이라고 했지? 이럴 줄은 진짜 몰랐어. 몰랐니? 부장님은 몇평 사시죠? 자네 동네는 어딘가? 왜, 왜 말해주지 않은 거지? 그야, 한 배를 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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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는 우리가, 내신과 등급으로 관리되는 이 삶에 이미 적응을 해버렸다는 사실이다. 40대의 자신이, 50대의 자신이 바로 내신제의 한복판에 있음을 망각한 채, 입시만 바뀌면 모든 게 바뀔 거라 막연히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즘 애들이 불쌍하다고? 불쌍한 건 아이들이 아니라 한 배를 탄 우리 모두다. 알아, 안다니까. 아니까 문자 보내지 마. 나오라고 문자 보내지 말라니까. 전달해줘, 포워딩 알지? 난 분명히 전달했어, 확인해봐.

왜 우리를 이렇게 기르고 관리하는가

그래서 졌습니다, 이제 맘대로 하세요- 의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인데, 아직도 의혹은 남아 있다. 그러니까 당신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이유로, 우리를 이렇게 기르고 관리하는가. 말하자면 대량으로, 경쟁력이 있고 우수한 한국인을 얻기 위해? 그래서? 이를테면 내신 1등급의 한국인들이 줄을 서서 국적을 포기하는 또 다른 살풍경 앞에서, 나는 그런 이유로 주중적국의 속뜻을 더 깊이 들여다보았다. 이는 보통 한 배 안에 적이 있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그 깊은 뜻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군주가 덕을 닦지 아니하면 자기 편일지라도 모두 적이 될 수 있음을 이르는 말. 무언가, 또 한번 홀가분하고 외로운 기분이다.

**** 기존의 ‘논단’이 ‘노땡큐’로 문패를 바꿔달고 새롭게 시작합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작가 박민규씨와 한국방송 <미디어포커스>를 진행했던 김신명숙씨가 독자들과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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