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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를 만드세요 | 김무곤

등록 2005-05-07 00:00 수정 2020-05-03 04:24

▣ 김무곤/ 동국대 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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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민 여러분께.
동북아시아에 망령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이 망령은 북한 핵, 중국의 군비 증강, 일본의 우경화를 부추겨 군비 경쟁을 격화하고 있습니다. 이 망령의 배회를 막지 않으면 지난 세기에 벌어졌던 끔찍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북한 핵 문제는 모든 아시아인들이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할 가장 긴급한 과제입니다.

일본 국민 여러분, 핵과 함께 살 겁니까

우선 우리는 북한의 핵개발을 단호히 반대해야 합니다. 북핵은 동북아시아 전체의 생명과 재산을 담보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방치한다면 이 지역에 핵 확산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이미 핵무기를 가지고 있고, 일본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만들 수 있는 기술과 자원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의 저명한 평론가 오마에 겐이치씨는 최근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90일 내 핵무기를 제조해 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는 기술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핵폭탄 2천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인 50t 이상의 플루토늄을 비축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북한 핵 문제는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해야만 합니다. 만약 강경 조치나 무력 행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해치려 한다는 점에서 핵을 보유하려는 사람들과 같은 의도를 가졌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본에서는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이 문제를 풀어나가자는 주장이 강경파들의 큰 목소리에 묻히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특히 일부 세력들은 북한의 핵 위협을 과거 회귀의 촉매제로 이용하거나, 군비 증강을 위한 구실로 삼으려 한다는 의구심이 듭니다. 평화를 바라는 모든 아시아인들은 이러한 기도에 합심해 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두 나라 국민의 친선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올해는 한류 열풍으로 조성된 우호적 분위기로 인해 40년 수교 이래 가장 친밀한 한 해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또 올해는 마냥 우호적 분위기로만 넘길 수 없는 특별한 해이기도 합니다. 우선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광복 60주년이며, 국권을 빼앗긴 을사조약 체결 100주년입니다. 일본이 아시아 침략을 본격화한 시모노세키조약 110주년이면서, 러일전쟁을 이긴 포츠머스조약 100주년입니다. 그러므로 2005년은 20억 아시아인들이 지난 전쟁의 상처와 평화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과거에 대한 통절한 반성에 이은 관대한 용서의 바탕 위에서 새로운 우정의 싹을 키워낼 계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내 극우세력들이 날뛰는 바람에 이런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리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박하사탕>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거꾸로 가는 기차의 환상을 봅니다. 그것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서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집니다. 나는 지금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그 영화의 주인공처럼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한 사람만이 기차에 몸을 던지지만, 그들은 일본 국민과 아시아인 전부를 위험한 기찻길로 끌고 들어가려 합니다.

일본 국민들이 먼저 이들에게 “노”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 “노”라는 목소리가 20억 아시아인에게 크고 명확하게 들릴 때, 그 순간이야말로 일본이 아시아의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여지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보통의 일본인이 가진 상냥함과 배려는 참으로 귀중한 덕목입니다. 다만, 그것들이 일본 내에서만 통용된다면 너무 아까운 일입니다. 이제 그것들을 이웃나라에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좋은 의미에서의 ‘친일파’가 아시아 곳곳에 생겨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유능한 한국의 가수 한 분이 ‘친일파’라는 굴레를 쓰고 자신의 일터에서 물러났습니다. 지금 아시아에서 ‘친일파’라는 말은 그 사람의 경력과 인격을 송두리째 빼앗을 수도 있는 최악의 욕설이고 비수입니다. 언젠가 이 말이 “평화를 사랑하고 이웃을 배려하는 나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바뀌는 날이 오기를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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