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참여연대 투명사회팀장
여의도, 국회 앞의 11월은 유난히 춥다. 거리의 천막들 탓이다. 그 속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황량해 보일 도시의 찬바람을 맨몸으로 맞고 있다. 변하지 않는 정치의 모습만큼이나 반복되는 거리의 풍경은 이제 연례행사처럼 굳어져간다. 달라진 것이라면 그 자리에 있던 당사들이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위치의 상징성은 퇴색했지만. 그럼에도 천막의 수는 계속 늘어간다. 그래야만 한다. 국가보안법 철폐, 언론개혁, 사학개혁, 과거사 청산. 그리고 이제 또 그렇게 고통스럽고 수고스러운 다른 천막이 준비되고 있다.
재미없는 집회, 무표정한 사람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다. 앞에 둔 촛불을 누군가 밟고 지나간 것이다. 잠깐 번쩍이는 구둣발을 봤을 뿐이다. 당황스럽다. 어이가 없다. 집회장에 앉아 나를, 그리고 우리를 되돌아본다. 명색이 ‘개혁입법’이다. 개혁이 한 시대의 옛것들을 흘려보내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나가는 것일 터인데, 그리고 그 함의는 공동체의 사회적·문화적·정치적 미래를 닦아가는 것인데, 어쩌다가 무관심에 짓밟히는 상황이 되어버렸는가. 우리의 주장은 메아리 없는 공허한 외침이 되고 말았는가. 집회는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과 가슴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정치인의 배신, 언론의 무관심, 옛것들의 폄하 정도는 참을 만도 하다. 하지만 11월의 찬바람보다 싸늘하고 무관심한 국민들의 표정은 작은 촛불의 온기로는 도저히 녹일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집회가 재미가 없다. “동지 여러분! 지금부터 집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우리의 결의를 다지는 함성을 질러보겠습니다. 전방을 향하여 함성 5초, 아~.” 그리고 민중의례, 열사에 대한 묵념, 제창, 이어지는 발언들. 이름과 내용만 바뀌었지 학창 시절의 애국조회, 군대에서의 아침 점호와 다를 바 없다. 반듯한 대오에 국기에 대한 경례와 순국열사에 대한 묵념, 애국가 제창, 교장선생님의 훈시. 그토록 경멸하고 비난하던 권위주의와 집단주의 문화가 민중과 개혁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역설치고는 좀 지독하다.
집회는 단지 결의대회가 아니다. 우리끼리의 한판 놀이도 아니다. 자유로운 참여와 토론의 공간이다. 넘치는 끼와 재치, 촌철살인의 언어로 시선을 묶어두고, 참여를 유도하는 사이버 공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우리들의 집회는 너무도 구태의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명분과 당위, 과거의 소통수단만으로 길거리의 사람들을 붙잡아두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해 보인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반대편의 사람들도 스피커의 출력을 빼곤 우리를 앞서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기야 그들에겐 이런 문화가 일상이니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닐지 모른다.
그동안 우리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말했다. 피해자의 아픔으로. 반대로 또 한쪽의 사람들은 국가보안법 사수를 부르짖었다. 기득권의 뻔뻔함으로. 언론개혁, 사학개혁, 과거사 청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피해자의 언어는 고통에 대한 연민을, 그리고 개혁의 절박함을 전해주지만 공감과 울림, 나아가 미래까지를 제시하는 데는 충분치 않다. 주위 사람들은 묻는다. 국가보안법이, 언론개혁이, 과거사 청산이 무엇이냐고. 하지만 피해자의 언어만으로는 난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옛것들의 머리요, 입이요, 그들을 지탱하는 발인데도 말이다. 끌어들여 움직이게 해야 할 궁극적 대상은 결국 이들 아닌가. 정치인도, 정치적 반대자도 아닌. 그것은 모두의 언어로 말할 때 가능하다.
추위는 옷자락을 여미게 하지만, 각오를 다지게도 한다. 천막 속의 고통이 얼마나 뼈저린지 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세상을 바꾸어왔다. 그동안의 노력에 거는 기대 역시 큰 올해이다. 그 마지막을 넘기 전에 또 다른 무엇을 준비해야 한다. 문득 길 건너편(옛 한나라당 당사 앞)에 눈길이 간다. 늘상 들어오던 구호소리와 운동가요임에도 성매매 종사자들의 농성 모습은 낯설었다. 내겐 익숙한 광경이 생경하게 느껴진 이유는 바로 그녀들 때문이었다. 그녀들 역시 파업가와 단결투쟁가가 생경했으리라. 물론 그들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은 무표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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