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정애/ 평화여성회 국방팀장
“시국선언서에 서명하셨습니까?”
“암, 당연히 했지.”
이른바 ‘원로’라는 사람들의 시국선언이 인구에 회자된 뒤 만난 자칭 ‘원로’ 한분은 자신의 시국선언 동참을 자랑스러워했다. 원로, 원로라…. 사전을 찾아보니 “지난날 관직이나 나이·덕망 따위가 높고 나라에 공로가 많은 사람. 또는 어떤 일에 오래 종사하여 경험과 공로가 많은 사람”이란다. 그런데 왜 내 머릿속에는 온통 부정적인 이미지뿐일까? 권력에의 굴종과 아부, 노회함, 이기주의, 아집과 편견 등.
일제시대 ‘면장님’이 시국선언하기까지
스스로를 원로라 칭하는 사람들. 이들은 우리 민족 모두가, 그리고 우리의 역사가 자신들에게 한없는 존경과 신뢰를 갖는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몰역사성과 사대주의와 기회주의로 요약되는 일군의 무리들을 보자. 일제 때 태어난 이들은, 나라를 내준 조상이 나쁘지 젊음을 바쳐 일본의 첨단 군사학이나 관료행정을 배워 나라가 독립한 뒤 조국을 위해 썼는데 그게 왜 나쁘냐고 항변한다. 일제 때 웬만한 수재들, 면장 정도 안 한 사람 어디 있느냐, 그 시대를 살지도 않았던 새파란 것들이 왜 자기 조상들을 다 죄인으로 만드느냐, 그리고 일본군 장교를 했더라도 하급장교인 소위, 중위가 뭘 했겠느냐고. 그러나 군대란 국가권력의 최선두에 선 가장 정치적인 조직으로, 중립적인 군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일제시대 일본 군대의 경우 “장교는 국가의 간성, 군대의 근간으로서 삼가 천황을 대원수로 받들어 모시기로 이미 맹세를 바친 몸으로서 폐하의 충성스런 부하가 되는 것”이었다. 하급장교일지라도 그들에게 조국은 일본이고, 목숨 바쳐 지켜야 할 것은 일본 천황의 안위로 상징되는 일본의 국가 이익이었다. 자신은 절대 조선인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이거나 고문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하시라도 명령이 떨어지면 독립운동가들에게 총구가 겨누어졌을 것은 뻔한 이치다. 일본 지배가 자기 당대에 끝장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이들이 외세에 의해 해방이 되자마자 조국 건설을 위해 젊은 시절 온몸으로 일본을 배웠노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재등장했다. 미군정은 이 군사기술자·행정기술자들을 남한 점령 유지를 위해 권력의 전면에 등장시켰고, 이들은 난성회·축지회 따위를 결성하여 백주 대한민국에서도 친일 인맥을 버젓이 유지시켜나갔다. 이후 그들은 미국을 섬기고, 온 가족을 풍요와 최첨단의 나라 신봉자로 만들어 미국 유학파로 일가를 이룬다.
그 뒤에는 쿠데타 앞에 철저히 자세를 낮춘다. 박정희가 무력으로 정권을 잡자 무조건 ‘각하’로 떠받들고, 박정희가 일본식 유신을 감행하자 한국적 민주주의의 성공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폈다. 또 다른 쿠데타 주인공 전두환에게도 똑같은 충성을 바친 그들. 그 대가로 대사, 공사 사장 등 각종 낙하산 인사를 독점하여 명예와 부를 움켜쥐었다. 이제 그들이 “너희들도 나를 따르라” 외친다. 이들의 역사 시계는 1950년에 멈춰 있다. 김일성의 무력통일 시도는 김정일에게도 이어져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권을 탄생시켰고, 한국전쟁 때 우리를 공산주의로부터 지켜주었으며, 지금도 방대한 우리 땅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은 우리를 지켜주는 절대적인 빅브러더이다. 미군을 나가라고 하는 사람은 천하의 역적이다.
일제시대에 태어난 인물이지만 모든 사람이 이들 같은 원로는 아니다. 내 주위에는 10년째 빛 바랜 강의록을 끼고 다니면서, 한국전쟁 때 맥아더가 만주를 폭격했으면 우리식으로 통일이 되었으리라고 강단에서 떠드는 사이비 원로 학자도 있지만, 자주적·민족주의적인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철저한 자료연구를 통해 한국전쟁과 관련해 중요한 연구성과를 내면서도 겸손하게 ‘노추(老醜)’를 말씀하시는 분도 계시다. 나는 그분을 진짜 원로의 한 사람으로 존경한다.
이 땅의 원로들이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후배들에게, “내 일생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지만, 되돌아보니 그때 그 선택이 우리 민족과 역사 앞에 잘못된 것이었다”는 자기 고백과 성찰을 보여준다면 먼 길 떠날 그대에게 존경의 꽃신을 신겨드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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