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록/ 한겨레21 편집장 peace@hani.co.kr
“할아버지께서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지만 친일파로 행세하지도 않으셨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가산을 탕진하지도 않았고, 친일행위 때문에 후손들이 공직에서 물러날 일도 없으니 할아버지께 감사해야 할 것 같다.”
‘과거사 논쟁’이 불붙기 시작할 무렵, 집권여당의 의장이 부친의 친일행위가 드러나 의장직에서 물러나자, 한 후배가 농담처럼 내뱉은 말이지만 촌철살인과 의미심장함이 배어 있다. 이미 잘 알려진 얘기지만 독립운동가 후손은 학비조차 없어 배우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학벌사회에서 도태돼 힘겹게 살아가야 하고, 친일행위자 후손은 물려받은 재산에 ‘가방끈’마저도 길어 주류로서 기득권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게 오늘의 우리 모습이다.
정치권을 포함해 사회 전체가 과거사 규명의 필요성에 공감해 규명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 것은 무척 다행스런 일이다. 한편으로 과거사 규명은 학술적 연구대상으로 접근하자는 주장도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60년 만에 역사를 바로 세우는 그 작업을 학술적으로 접근해서야 과연 얼마나 진전을 이뤄낼 것이며 얼마나 관심을 불러일으킬지 회의적이다. 그래서 과거사 규명 작업을 주도할 기구는 국가가 예산 및 활동을 전적으로 지원하되, 독립적 권한과 책임을 갖는 외부기구가 맡는 게 옳을 듯싶다.
정치권에서는 친북·용공 행위를 조사대상 과거사에 포함시킬 것인가를 놓고 옥신각신하고 있다. 물론 친북·용공 행위도 친일행위와 마찬가지로 ‘아픈’ 우리의 과거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모처럼 조성된 남북 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친일이 다른 나라인 일본을 위해 우리 국가와 민족을 부정하고 수탈한 행위라면, 친북·용공은 우리 민족간에 체제와 사상을 달리해 빚어진 행위였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친북·용공은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아직 진행형이며, 친일행위와 의문사 및 인권유린 행위만을 규명하는 데도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는 점도 감안했으면 한다.
한국방송(KBS)에서 진행되고 있는 과거 청산 작업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지난날 ‘정권의 나팔수’ ‘철밥통 고액연봉’으로 상징되던 KBS가 규명조차 필요 없는 뻔한 ‘과거’를 털어내기 위해 노사가 팔을 걷고 나섰다고 해 그 내부를 깊숙이 들여다봤다. 세찬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는 KBS에 변화의 기운이 감돌기도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성패의 관건은 역시 구성원 모두의 과거 청산 의지일 것이다. ‘소나기만 피하면 된다’는 식의 구태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고 있어 결과에 대한 평가는 뒤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어쨌든 과거사 규명은 이제 우리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고, 모든 분야에서의 과거 청산은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장치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때아닌 ‘할아버지 타령’을 한 후배로부터 듣고 싶은 말이 있다. “다시 우리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받는다 해도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기꺼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 “다시 독재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면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기꺼이 민주주의를 위해 몸을 바치겠다.” 과거사 규명을 서둘러 마무리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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