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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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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

등록 2004-08-20 00:00 수정 2020-05-03 04:23

▣ 배경록/ 한겨레21 편집장 peace@hani.co.kr

아테네 올림픽의 열기 속에 제59회 광복절을 맞았다. 올림픽 개막식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를 재현하고 근대 올림픽 정신을 되새긴 여러 가지 볼거리에 입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 벅찬 환희와 감동 때문에 남북한 동시 입장조차 약간은 뒷전으로 밀린 듯하고 메달에 대한 집착마저 부질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번 개막식이 역대 개막식 중 가장 인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더 강렬한 평화의 메시지를 세계인들에게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아테네시 한복판에 옛 모습 그대로를 뽐내고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보면 그리스가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가꿔왔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나지막한 스카이라인 위에 우뚝 솟아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올림픽 개막식이 열리고 있는 그 순간, 지구촌 곳곳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통신사인 는 △이란인 수천명, 테헤란 시내에서 반미시위 △몰디브 정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인터넷 접속을 폐쇄하며 민주화 운동가 100여명을 구속 △서부텍사스 중질유 가격, 배럴당 46.58달러로 사상 최고기록 경신 등의 기사를 타전하고 있다. 인류애과 평화공존이라는 올림픽 정신은 아테네, 그것도 개막식이 열린 올림픽 주경기장에서만 피어나고 있을 뿐이다. 잠시 감동이 비켜간다.

8월15일 오후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 서울 광화문과 시청 앞을 지나게 됐다. 마침 이곳에서는 광복절을 맞아 시민사회단체들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일상의 모습이 된 지 오래지만 행사는 어김없이 진보와 보수 양쪽으로 나뉘어 열렸다. 한쪽에서는 한반도 평화 정착과 이라크 파병 철회 등을 촉구하는 행사를, 또 한쪽에서는 친북세력을 우려하는 반공행사를 각각 열고 있었다. 일상이 돼버린 또 하나의 모습은 광화문 앞부터 시청 앞까지 도로 양 옆에 일렬로 늘어선 경찰버스. 1945년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과 감격이 물결쳤던 이 거리를, 오늘은 행사장 앰프 소리와 경찰버스가 메우고 있다. 진보와 보수 단체 회원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고 경찰의 물대포에 맞서 투석전이 벌어진다. 도시가 질식하고 있었다.

세종로를 뒤로 하고 돌아서면서 아테네 올림픽 개막식 장면과 자꾸 겹쳐져 뒷맛이 영 씁쓸하다. 그때 문득 오전에 있었던 광복절 기념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한 경축사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그동안 여러 이유로 수십년을 미루어왔습니다. 언젠가는 해야 할 과제라면, 반드시 풀어야 할 역사적 과업이라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합니다. 지금이 질곡의 역사를 직접 경험한 세대가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래서 내년에는 역사를 바로잡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광복 예순 돌’을 이 자리에서 다시 기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광복 예순 돌은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맞는 셈이다. 요즘은 사람의 수명이 늘어나면서 환갑잔치를 생략하는 편이지만 내년 광복절에는 바로 세운 우리의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축하는 한마당 잔치를 벌여봤으면 좋겠다. 과연 1년 뒤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갈 길은 먼데 벌써 해가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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