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동민/ 충남대 교수 · 경제학
꽤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란 대통령을 국민들이 직접 뽑을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문제와 동치돼왔다. 코흘리개 초등학생 시절, 내가 태어날 때부터 대통령이었던 이가 실내체육관에서 투표 비슷한 시늉을 하고 나서 새로 대통령이 되었다면서 텔레비전 브라운관 밖의 국민들을 향해 손 흔들기 시작한 그 무렵, 우연의 일치였는지 학년이 바뀔 때마다 연례행사로 치르던 반장선거가 담임선생님에 의한 ‘임명’으로 바뀌면서부터, 적어도 내 머릿속에서 민주화와 직접선거는 같은 것이었다.
성경 수업에 1인시위로 반대했던 고교생은…
쿠데타의 주역이 직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때문에 절망하면서 잠깐이나마 우매한 군중을 현명한 폭력(?)으로 다스리는 철인정치를 꿈꾼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의 일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통령 직선제 요구는 미 제국주의와 군사파쇼 정권을 연결짓는 핵심고리를 공격하는 것이라던 그 시절의 대자보에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의 일이었다. 그 뒤로도 20여 년, 나는 고작해야 두 김씨 중에 누가 더 ‘진보적’인가, 기호 1번을 낙선시키기 위해 성에는 안 차지만 2번에 투표하는 것이 옳은가, 소신대로 3번으로 가는 것이 옳은가 따위의 직업 정치가 수준의 정치공학적 산술 속에 파묻혀 살았다.
서울 시내의 어느 고등학교 학생이 학교의 기독교 교육 방침에 맞서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허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1인 시위를 하였다고 한다. 매주 한 시간씩 ‘성경’이라는 교과목을 배워야 했고 채플에 참석해야 했을 뿐 아니라, 담임선생님의 독실한 신앙 때문에 덤으로 매일 조회와 종례 시간에 기도와 찬송까지 해야 했던 나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그럴듯하게 종교의 자유나 양심의 자유라는 명분이라도 생각해낼 수 있었더라면 좋으련만, 내가 한 것이란 고작해야 뒷자리에 앉아 비아냥거리기 아니면 눈치 봐가면서 졸기 정도였으니. 불행 중 다행으로 그런 경험이 현실로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이력서에 연구실적물 보따리 들고 직장 찾던 시절, 종교 계통의 대학에서 신자증명서를 제출하라는 요구조건을 보면서도 그것에 체계적으로 맞설 생각보다는 그저 그 고등학교 때의 영향으로 목사가 된 신실한 동창생에게 부탁하면 별 문제 없을 거라는 식의 생각에 머무른 것이 내 수준이었다.
그 학생에 대한 학교쪽의 대응이란 강제 전학이라는 지극히 ‘80년대적인’ 방식으로 귀결돼가는 듯하다. 비록 자고 나면 세상을 뒤흔들 일이 한 건씩 터지는 탓에 기성언론에서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할 중요한 계기임이 알려지는 데는 적어도 직접선거가 바로 민주주의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님을 깨닫는 데 걸린 시간보다 훨씬 짧을 것이다.
폭력적인 전향 공작의 대상으로 사망한 비전향 장기수, 쉽게 말해 남파 간첩에 대해 ‘의문사’를 인정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에도 반대 의견이 비등하고 있다. 실제로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인터넷 한겨레의 라이브폴에서도 반대 의견이 65% 정도를 차지한다.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직설적이고 과격한 의견이 많은 탓도 있겠지만, 반대의 논리는 빨갱이가 민주화라면 김일성·김정일도 민주화냐 따위의 단순화된 논리가 대부분이다. 하긴 공작선 타고 침투하여 독침 들고 접선하며 입만 열면 특유의 스타카토 어법으로 ‘수령 동지’나 ‘동무’를 주워 섬기던 의 간첩에게 인권이나 양심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랴?
‘남파간첩의 양심’ 논쟁이 보여주는 희망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에게 수십년 동안 ‘별 문제 없이’ 잘 이루어져왔던 종교 교육을 거부하며 소동을 일으키는 ‘문제아’의 반항이 경우에 따라서는 사탄의 몸짓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처럼, 상당수 사람들에게 남파 간첩의 ‘양심’을 인정하는 것이 친북 세력의 사주나 폭력혁명의 인정으로 보이는 현실은 한편으로는 서글프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희망과 의지를 갖게 만든다. 최소한 투표전술 따위로 논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함에 따라 우리의 편협한 의식을 단도직입적으로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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