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들기 전부터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단일민족이라는 주문 속에 자라나 민족주의적 감성을 체득하고 살아가는 것이 보통인 우리나라에서도 언제부터인가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상상에는 나름대로 물질적인 근거가 존재하는 법일 터이므로, 그저 상상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상상은 현실에 대한 주관적인 희망이나 가벼운 오해 정도를 넘어서서 때로는 적극적으로 현실을 호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결국 어디까지가 참아줄 만한 상상이고 어디서부터는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될 상상인가를 식별해내는 것은 참으로 어렵지만 끊임없이 제기돼야 할 문제이다.
선거 때마다 되풀이된 고민
일부를 제외한 모든 참가자들이 적당히 만족할 수 있는 결과로 끝난 ‘황금분할의 윈윈게임’이라는 총선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수많은 상상의 담론들이 여기저기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어떤 것은 처참히 깨져나가고 어떤 것은 뜻밖에도(?) 늠름하게 살아남는 모습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 ‘한겨레’ 주위에서 맴도는 나 같은 이들이 선거 때마다 겪는 고민 중의 하나는 비판적 지지냐 아니면 지옥의 입구에서라도 머뭇거림 없이 나의 길을 가느냐라는 것이다. 내가 던지는 한 표가 죽은 표가 되느냐 아니냐 따위의 전략적 사고, 아니 기술적인 문제가 등장하는 것은 결국 해당 선거의 전선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판단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무슨 일이 있어도 최소한 죽쒀서 개 주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지상명제가 되는 선거라면, 그 ‘무슨 일’ 중에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중대하게 반하는 사안이 생길 것이 뻔히 보이더라도 그 ‘개’를 쫓아내는 데 한 표를 던져야 한다. 명예훼손이라는 덤터기를 쓰지 않기 위해 굳이 그 개가 누구고 그 무슨 일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밝히지는 않더라도,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쟁취 이후 이 땅에서 이루어진 선거들은 대체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시절 처음 선거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던 내 또래들, 정확히 말하자면 멀리는 박정희 정권, 가깝게는 5공이나 6공의 군사정권을 기억하는 세대들이 받아들이고 몸에 붙여버린 중요한 대립전선은 독재·군사 정권 대 민주화 세력이었다.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결합”이라는 그럴듯한 설명 속에 전선이 뒤얽히기 시작한 이후에도 그랬다. 그래서 말이다. 어차피 내 말 듣고 정치할 리도 없고 내가 그들의 뒤를 봐줄 수 있는 것도 전혀 아니지만, 한때 날리던 운동권 출신의 인사들이 ‘이쪽’에 줄서면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하면서, ‘저쪽’에 줄서면 하다못해 술자리에서 ‘걔, 왜 그렇게 된 거야’ 따위의 치기 어린 독설이라도 쏘아붙여야 될 듯한 의무감에 시달리곤 했던 것이다. 별다른 과학적 근거 없이 개인적 경험에만 기초하여 추측컨대, 선거기간 중의 여론조사나 선거 당일의 출구조사가 실제보다 ‘이쪽’을 체계적으로 과대평가하는 오류가 발생한 이유 중의 하나도 이런 것이리라 생각된다.
그동안 저지른 소행이 괘씸하기 짝이 없다는 점을 다 인정하더라도, 그 옛날 독재자의 ‘시다바리’들이 권력의 단물을 빨아먹고 다닐 때 길거리나 안기부 지하실에서 풍찬노숙하던 민주화 세력의 후예들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모습은 역설적으로 우리들 머릿속에만 남아 있는 상상의 전선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세상이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을 인정할 수 없다며 도리질을 쳐대는 일부 우국지사들 또한 이미 그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전선을 붙들고 앉아 있는 셈이다.
‘상상의 공동체’를 해체하라
그 옛날의 헤어스타일까지 그대로인 채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독재자의 딸”이 새로운 리더십으로 변신하는 오늘이 이러한 상상의 희비극적 재생산이라면, 그저 어디에 줄서서 누구와 일하고 있는가만으로 여전히 ‘그들’과는 다른 ‘우리’임을 강조하는 것 또한 똑같은 ‘상상의 공동체’ 속에 머물 것을 끊임없이 강요하는, 따라서 청산되어 마땅한 기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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