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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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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러리 그만/ 안정애

등록 2004-04-09 00:00 수정 2020-05-03 04:23

안녕하신지요.

얼굴도 모르는 당신에게 붓을 들었습니다. 여성 지역구 후보로 또는 비례대표로 나선 당신, 탄핵 정국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얼마 남지 않은 총선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구려.

항상 부드러우면서도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당신의 모습에 가슴 뿌듯합니다만 최근 돌아가는 탄핵 정국이 여성인 당신에게 만만치 않은 시험대인 것 같아 조마조마하기도 합니다. 남성 정치인이 만들어놓은 지저분한 정치판, 부정부패와 파벌주의와 이기적인 정쟁의 부정적 인식을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과 화합의 이미지를 이용, 잠시나마 당신의 얼굴을 빌려 위기를 모면해보고자 하는 얄팍한 술수가 아닐까 경계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땅의 여성 정치인들에게

‘얼굴 마담’으로 당신을 선택, 여차직하면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대기’에 걸려들지 않게 조심 또 조심하시라 당부하고 싶군요. 총선의 부정적 결과가 “여자들이 해봤자 똑같지 않느냐”라는 남성 정치인들의 볼멘소리로 이어질 수 있고, 그것은 온갖 더러움으로 얼룩진 정치판을 깨끗이 하기는커녕 그 판을 만든 남성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다시 예전의 남성 위주의 부정적인 정치판이 재연되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우려스러운 일은 마치 전쟁의 당사자인 남성은 멀찌감치 뒤로 빠져 있고 여성들이 전면에서 대리전을 치르는 양상으로 비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렵고 힘든 이때, 을 벤치마킹함은 어떠하올지. 장금이는 수라간에서건 어의실에서건 자신의 실력을 당당하게 펼쳤지요. 그 어떤 연줄도, 남성의 비호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번 17대 총선이 예외가 될지 아니면 그야말로 여성 정치 세력화의 원년으로 기록될지는 당신의 실력에 달렸습니다. 화려하게 화면을 장식하다 스러지는 그런 여성의 모습은 이제 그만, 들러리는 그만 서란 말입니다.

당신이 딛고 선 땅, 그곳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똑바로 보십시오. 상습적으로 구타당하고 위자료는커녕 맨몸으로 거리로 내쫓기는 아낙네, 무기력하게 성폭력에 노출되는 여성 장애우, 갓난애를 둘러업고 노점상으로 나서야 하는 빈민촌 아줌마, 굶주림에 지쳐 자살하는 10대 소녀 가장, 취업 차별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해 좌절하는 여학생, 정부로부터도 외면당하는 종군위안부 할머니, 성의 노예가 되어 쇠창살에 갇힌 채 불타 죽는 성매매 산업 종사자, 미군의 성범죄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 기지촌 여성들이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직시하고, 이들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을 느끼면서 살 수 있도록 하란 말입니다.

“나를 여성으로 보지 말고 정치인으로 봐달라”는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 여성임이 부끄럽고, 가부장제적 남성 중심의 정치문화에 매몰되어 끝까지 첨병 노릇을 하겠다는 얘기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대통령이었는지 야당 지도자였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힘으로 당당히 설 때입니다.

그리고 말실수를 하지 말고 신중하십시오. 당신 맘에 안 든다고 함부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는 독설을 내뱉으며 남성들과 한패가 되어 돌팔매질을 하는 건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오. 국민이 뽑은 대통령, 탄핵도 국민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국회의원들이 민의도 묻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하는 건 그야말로 쿠데타입니다.

당당하시오, 신중하시오

또한 이 땅 한반도와 지구상에 평화의 씨앗을 심는 여성상을 만들어갑시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여성입니다. 포연 속에서 갓난아기를 안고 절규한 수많은 어머니의 모습을 잊지는 않았겠지요? 국가 안보의 폭력적 해결책인 전쟁은 남성화되고 위계화된 논리입니다. 언제 여성이 주체가 되어 지구상에 전쟁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까? 여성은 항상 ‘타자’로서 또는 ‘객체’로서 전쟁의 희생만을 강요당했던 것이 인류의 전쟁사입니다. 이라크 파병은 막아야 합니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용병’ 시비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멀쩡한 우리 자식을 왜 남의 나라 침략전쟁에 내모는 겁니까? 그리고 북한 핵문제도 힘이 아닌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갑시다. 서울에서 또 평양에서 여성들끼리 대포로 빵을 만드는 얘기를 진지하게 나누어봅시다. ‘감성적이다’ ‘나이브하다’는 남성들의 손가락질이 무색해지도록 이 땅에 평화의 거목을 자라나게 합시다.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과 돌봄과 상생의 기질이 이 땅의 정치판에, 그리고 전 한반도에 작은 씨앗으로 심어진다면 불가능한 꿈은 아닙니다.

총선에서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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