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사망으로 실시된 베 네수엘라 대선에서 차베스의 후계자인 통합 사회주의당의 니콜라스 마두로 후보가 당선 됐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남미 여러 나라 순 방길에 올랐다. 그중 한 나라인 브라질에서 마두로 대통령은 자신에게 두 사람의 ‘정치 적 아버지’가 있다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두 아버지 중 한 사람은 당연히 고 차베스 전 대 통령이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베네수엘 라가 아닌 브라질 사람이다. 루이스 이나시 우 다 시우바, 즉 브라질 전 대통령 룰라다.
노동자당 정부 11년에 대한 상반된 평가
좀 뜻밖이라 여길 수도 있겠다. 그간 대다 수 언론이 중남미 좌파를 ‘온건’ 좌파와 ‘강 경’ 좌파로 나누고 룰라와 차베스가 각 노선 의 대표인 양 소개해왔기 때문이다. 마치 룰 라와 차베스가 남미 좌파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치열한 경합이라도 벌이는 것처럼 보도 하기 일쑤였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차베스 의 후계자가 룰라를 차베스와 동격에 놓고 높이 평가하는 게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단지 이 정도가 아니다. 룰라 는 이번 베네수엘라 대선에서 내정간섭의 위 험을 무릅쓰며 노골적으로 마두로 후보를 편들기까지 했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우선 남미 좌 파에 대한 주류 언론의 시각이 사실과 다르 다는 것이다. 룰라 대 차베스식 경쟁 구도는 미국 쪽 논평가들의 머릿속에서나 작동한 다. 경쟁보다는 오히려 굳건한 동지애가 진 실에 더 가깝다. 더불어 확인하는 것은 룰 라가 라틴아메리카 좌파 전체에서 차지하는 높은 위상이다. 그것은 룰라 한 사람만이 아 니라 그의 뒤를 이어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 세프가 이끌고 있는 브라질 노동자당(PT) 정부의 위상이기도 하다.
사실 노동자당 정부의 지난 11년에 대해서 는 상반된 평가가 있다. 그중 절반 이상이 실 망과 환멸이다. 집권 이전 룰라와 노동자당 에 쏠렸던 관심과 기대를 돌이켜보면 그럴 만도 하다. 브라질 노동자당은 1980년에 노 동자 대투쟁의 결실로 처음 등장해 80년대 내내 군부독재 정권과 대결하며 성장했다. 바로 이 시기에 서유럽에서는 좌파가 신자 유주의 지구화 공세에 하나둘 무릎을 꿇고 있었다. 브라질 노동자당의 성장은 이런 중 심부 좌파의 모습과 극명히 대비되었다. 민 주화 이후 첫 대통령 직선(1989년)에서 금속 노동자 출신인 이 당의 대선 후보 룰라가 일 약 돌풍을 일으키자 더욱 그러했다.
브라질 경제의 구조적 문제인 외채에 대 해 룰라 후보는 상환 중지 혹은 재협상을 공약했다. 지금 그리스에서 급진좌파연합 (SYRIZA)이 대변하는 대안이 20여 년 전 에는 브라질 노동자당의 핵심 공약이었다. 이후 10년 넘게 여러 우여곡절을 거친 뒤, 2002년 대선에서 룰라 후보가 마침내 대통 령에 당선되었다. 10여 년 전의 룰라와 노동 자당을 기억하는 이들은 어렵사리 집권에 성공한 브라질 좌파가 최소한 외채 재협상 을 통해 초국적 금융자본에 맞서는 첫 번째 주자로 나서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이 기대 는 무참히 깨졌다. 룰라는 당선되기도 전에 벌써 월스트리트에 맞서는 어떠한 도전도 감 행하지 않겠노라 서약해버렸다.
재선 원동력이 된 ‘보우사 파밀리아’
그 뒤 브라질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급 진 좌파 입장에서는 대체로 실망스러운 것이 었다. 특히 2005년에 터져나온 룰라 정부 고 위 인사들의 잇단 부패 스캔들은 변호의 여 지가 없는 것이었다. 브라질은 베네수엘라 와 달리 점차 외국 좌파의 관심권에서 멀어 졌다. 노동자당은 ‘제3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신자유주의 집행자 노릇을 하고 있 던 영국 노동당의 남반구판 정도로 취급받 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비판만으로는 이후의 사태 전개를 다 설명할 수 없다. 부패 추문에도 룰라는 2006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흥미로운 것은 지지 기반이 크게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2002년 대선에서는 노동자당의 전통적 지지층인 남부의 조직 노동자와 중산층이 룰라에게 표를 던졌다. 그런데 4년 뒤에는 중산층이 이탈한 반면 도시 빈민이 룰라의 적극 지지층으로 선회했고 발전한 남부보다는 낙후한 북부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투표층의 성격만 놓고 보면 1기 룰라 정부보다는 2기 쪽이 훨씬 더 ‘가난한 이들의 정부’라는 표현에 부합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 즉 남부 대도시 빈민과 북부 빈농이야말로 브라질 민중의 가장 큰 구성 요소다.
이들 새 핵심 지지층을 중심으로 노동자당 정부의 지지 기반이 새롭게 탄탄히 구축되었다. 그 결과가 룰라 대통령이 퇴임할 때까지 계속된 지지율의 고공 행진이다. 룰라의 지지율은 퇴임이 가까워올수록 더욱 늘어나 평균 70% 선을 상회했다. 이런 높은 지지율은 후임 호세프 대통령으로 고스란히 이어져 현재 80%에 육박하고 있다. 룰라 정부 말기가 2008년 금융위기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기존 집권 세력이 불신의 대상이 되던 때임을 감안하면 더욱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이 성공의 핵심에는 룰라 정부가 가장 야심차게 추진한 사회정책이 있다.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것을 전제로 저소득 가정에 매월 복지수당을 지급하는 ‘보우사 파밀리아’(‘가족수당’이라는 뜻)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대선이 있던 2006년까지 브라질 국민의 약 25%에 해당하는 1100만 명 이상의 가정이 보우사 파밀리아의 혜택을 받았고, 이것이 룰라 재선의 원동력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제도 덕분에 브라질의 극빈층 비중은 룰라 정부 첫해인 2003년에 12%이던 것이 2008년에는 4.8%로 확연히 줄었다. 룰라 대통령 임기 동안에만 2800만 명이 빈곤에서 벗어났다. 노동자당 안에서 애초 이 제도를 제안한 이들에 따르면 이것은 모든 국민에게 무조건 현금 수당을 지급하는 ‘시민기본소득’으로 나아가는 제1단계지만, 여하튼 보우사 파밀리아는 그 즉각적 효과만으로도 브라질 역사의 변곡점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30년대 미국의 뉴딜이나 같은 무렵 스웨덴의 복지국가 건설을 떠올리게 하는 사례다.
그러나 여전히 단서가 따라붙는다. 보우사 파밀리아는 훌륭한 ‘복지’ 정책이기는 하되 ‘재분배’ 정책은 아니다. 룰라 집권 이후에도 부유층 과세 부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노동자당 정부는 조세제도를 손보지 않고 다만 집권 이후 지금까지 지속된 경제성장으로부터 복지 재원을 확보했다. 덕분에 부유층은 빈민 가정이 보우사 파밀리아로 가난에서 탈출하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재산을 불리는 기쁨을 누렸다. 극빈층은 줄었지만 빈부 격차 자체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는 지난 10년간 유지된 성장률에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새 복지제도 역시 큰 타격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세계경제 위기는 브라질만 쉽게 비껴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21세기 사회주의’ 핵심은 국제주의
아쉬운 건 이뿐만이 아니다. 과거 스웨덴의 복지국가 건설은 이 나라 노동자들의 조직적 역량이 성장하는 과정과 함께했다. 단지 노동자의 복지 수혜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조직률이 90%로까지 늘어났다. 한데 브라질의 조직률은 우리보다 단지 조금 높은 17%에 불과하다. 노동자당 정부가 들어서고도 이 수치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노동자당 정부의 10년 넘는 집권에도 브라질 사회의 계급 세력 관계는 그다지 바뀌지 않은 것이다.
대차대조표를 정리해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브라질 노동자당은 신자유주의와는 방향을 달리하는 사회개혁을 나름대로 추진하고는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회 모델을 구축하는 것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굳이 말하면, ‘제3의 길’식 신자유주의 적응 노선과 남미판 ‘스웨덴식 개혁’ 시도의 중간 어디쯤에 있다고 할까.
다만 여기에 결정적으로 한 가지 보태야 할 게 있다. 노동자당 정부가 거의 의도적일 정도로 국내 정책의 이러한 한계를 과감한 대외 정책으로 보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룰라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이라크 전쟁에 단호히 반대했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중남미로까지 확장하려던 미국의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시도를 파탄 냈다(같은 시기 노무현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포로가 된 것과 비교된다). 호세프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팔레스타인 주권국가 건설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브라질 좌파 정부의 대외 정책이 베네수엘라 등 다른 남미 좌파 정부들과 만나서 진보적 남미 통합으로 결실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에 출범한 남미국가연합은 그 중심 무대이며, 룰라가 이 조직의 차기 사무총장 물망에 오르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중심에는 노동자당의 이념가이자 전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외무장관인 세우수 아모링이 있고, ‘21세기 사회주의’의 핵심 중 하나는 ‘국제주의’임을 역설하는 대통령 외교보좌관 마르코 아우렐리오 가르시아가 있다. 노동자당이 창당 때부터 표방해온 ‘민주적 사회주의’ 이념이 국제 정책으로 육화돼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신임 대통령이 룰라에게 보낸 찬사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남미의 가장 거대한 나라 브라질에 반신자유주의 국제연대를 추구하는 좌파 정부가 건재하다는 사실이 라틴아메리카 좌파 전체에 갖는 중대한 의미가 그의 발언에 담겨 있다. 노동자당을 처음으로 브라질 밖 세상에 알린 책(우리말로는 라는 제목으로 나왔다)의 저자이면서 지금은 노동자당 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자이기도 한 에미르 사데르 같은 좌파 지식인이 비판적 ‘지지’ 입장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 또한 같다.
정부 안 진보파와 동맹해 개혁 압박해야
그래서 사데르는 노동자당 정부와 정면 대결하기보다는 정부 안의 진보적 부분과 동맹을 맺고 좀더 급진적인 개혁을 압박하는 전략을 추천한다. 아무튼 그 주체는 사회운동이다. 노동자당 정부의 모순적 정책과 실천을 브라질, 더 나아가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사회적 세력 관계를 뒤바꿀 방향으로 구부려야 한다는 과제가 지금 브라질 사회운동에 있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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