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단 도원결의’ 구성원들과 두 종류의 완두를 심고 지난해 베어둔 풀 잔사를 덮어줬다.
많은 사람이 농사를 말할 때, 노동의 숭고함을 말하곤 한다. 농사에 왜 이런 찬사가 따르는지는 작은 텃밭만 일궈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혼자 하는 노동은 명상에 빗대도 손색없을 정도로 머리를 가볍게 하고, 때로는 단순한 일을 반복하며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그저 보이는 일을 해결했을 뿐인데 멀끔한 밭과 상쾌한 머리는 덤이다.
그렇게 고요한 시간을 보내다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작은 것들이 움직이고 변하는 모습은 어찌나 신비로운지! 언제나 반복되는 풍경이지만 나만 아는 비밀과 특별함이 곳곳에 있다. 하루하루 조금씩 달라서 평생 질릴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아침에 음식물쓰레기 비우러 밭에 가서 눈에 보이는 일을 조금씩 하면서 달라진 것들을 보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아내의 이런 습성을 잘 아는 남편은 휴대전화에 타이머를 맞춰놓으라 신신당부하는가 하면, 전화해 이제는 밭에서 빠져나올 시간임을 알린다. 요즘은 뾰족뾰족 올라오는 구근 싹을 보느라 세월을 보낸다. 구근 가격이 아무리 비싸도 심길 잘했지, 아직 땅이 충분히 녹지 않은 3월이 정말 심심할 뻔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농사의 기쁨은 밭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이런 밭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연결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밭에서 플로깅(조깅이나 산책을 하며 쓰레기를 줍는 환경보호 운동)하는 작은 모임을 열어 나보다 더 심하게 ‘쓰레기 유난’을 떠는 동지를 만나기도 했고, 지난해부터는 건물이 지어지지 않은 곳에 호밀을 잔뜩 파종해 이웃과 함께 ‘호밀밭’을 일구며 우정을 나눴다. 인생에는 마음 수련이 반드시 따라야 하지만 때로는 도파민도 필요한 법. 작은 즐거움을 위해 올해부터는 또 다른 사람들을 초대해 공동 농사를 짓기로 했다.
모임원은 함께한 지 벌써 3년이 된 여성 연구자들. 각자 분야는 조금씩 다르다. 각자 농촌 공동체, 농업협동조합의 역사, 농촌 복지를 연구하는 이들인데 모두 여성농민 생산자 협동조합 ‘언니네텃밭’의 열성팬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도모하다 전부 무산됐지만,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 꼭 만나 그동안 일하면서 가본 현장 이야기를 나눈다. 별것 없지만 꾸준한 모임의 이름은 여전히 처음 만난 날에 가제로 지어둔 ‘일단 여성농민 화이팅’이다.
올해는 동네 간짜장 맛집 ‘도원’에 모여 이들과 함께 농사짓기로 했다. 이름은 ‘일단 도원결의’. 이 식당에서 벌써 세 번째 만나 농사 계획도 하고, 서로 의자매를 맺지는 않았지만 나름 농사에 대한 거창한 결의를 다졌으니까. 현장에서 농민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흙을 만져보자는 취지다.
결의 후 첫 작업은 두 종류의 완두 파종. 모임원에게 올해로 도시농부 12년차인 내 작은 비법을 전수했다. 먼저 틀밭에 한 뼘 간격으로 작은 고랑처럼 길게 가로줄을 파고 완두 씨앗을 다시 한 뼘 간격으로 뿌린다. 그리고 완두 씨앗이 있는 곳을 위주로 흙을 살살 덮어 파인 것이 유지되게 한다. 그럼 비가 오거나 물을 줬을 때 수분을 가두는 데 조금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전에 베어둔 풀 잔사로 땅과 씨앗을 덮어 수분 증발을 막는다. 완두는 자라면 하나하나 지지대를 세우지 않는다. 대신 틀밭 꼭짓점을 중심으로 크게 지지대를 박고 마끈으로 감아 한데 묶는다. 서로 손을 맞잡으며 자라기 때문에 거창한 지지대가 없어도 충분하다. 우리도 이렇게 손 맞잡고 기대어 올해를 즐겁게 보낼 수 있기를.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농사꾼들 :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네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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