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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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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야, 버텨다오’ 가을이면 고기 굽던 주말농장

무청이 시리도록 푸르게 자라도 쓸쓸한 건 가을 탓일까, 나이 탓일까
등록 2025-10-25 09:13 수정 2025-10-25 14:24
올해 처음 모종을 낸 무가 텃밭에서 싱그럽게 자라고 있다.

올해 처음 모종을 낸 무가 텃밭에서 싱그럽게 자라고 있다.


더위로 힘겨웠던 여름은 갔다. 주말농장엔 가을이 완연하다. 무와 배추는 쑥쑥 자라고, 갈무리할 작물도 여럿이다. 때맞춰 내년 봄 수확할 마늘과 양파도 심어야 한다. 참, 월동 시금치도 씨를 뿌려야지. 밭으로 향할 땐 마음이 바쁜데, 일단 도착하면 싱숭생숭해진다. 텃밭 가득 작물이 빼곡한데도 왠지 모를 쓸쓸함이 밀려든다. 계절 탓인가, 나이 탓인가?

 

배추도 무도 성공인데 상추가 걱정이네

 

추석을 전후로 비가 많이 내렸다. 처음엔 내심 반겼다. 이즈음 배추는 물을 많이 먹는다. 물이 충분해야 속이 찬다. 반가운 마음은 금세 걱정으로 바뀌었다. 비가 와도 너무 온 탓이다. 비를 피해 찾아간 텃밭은 축축했다. 군데군데 물이 고였고, 흙도 물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장화 신은 발이 밭에 쑥쑥 빠졌다.

다행히 배추는 무탈했다. 천연살충제 제충국을 몇 차례 뿌려준 뒤 좁은가슴잎벌레의 활동성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그사이 영양제(복합비료) 덕분인지 배추가 빠르게 자랐다. 이제 제법 속이 차기 시작한다. 진딧물만 피하면 올가을 배추농사는 성공작이 될 수 있겠다 싶다. 아무렴 늦더위와 해충 탓에 알배추 수준이었던 지난해만 못할까?

무도 잘 자랐다. 종자 대신 모종을 택한 게 ‘신의 한 수’였다. 큰 놈은 벌써 담뱃갑만 해졌다. 시리도록 초록인 무청도 풍성하다. 텃밭 농사 초기엔 겨울이면 옷걸이에 주렁주렁 무청을 걸어 베란다에서 시래기로 말렸다. 몇 년 전부터 김장농사가 초라해지면서 한동안 시래기는 구경도 못했다. 무청 사진을 본 아내가 “간만에 시래기 좀 말릴 수 있겠다”며 반긴다.

비 피해가 막심한 건 상추다. 잎이 앙상해져 시름시름 앓는 모양새다. 원래 가을 상추는 봄 상추보다 잎이 두툼하다. 꺾으면 또각또각 소리가 날 정도다. 몇 차례 수확도 못했는데 철이 끝난 것 같다. 가을엔 툭하면 밭에서 불을 피워 고기를 구웠다. 날이 좋아도, 날이 좋지 않아도, 날이 그럭저럭해도 동무들과 둘러앉아 막걸리잔을 기울였다. 올핸 아직 한 번도 불을 피우지 못했다. 상추가 조금만 더 버텨주길 간절히 기원했다.

콩은 병에라도 걸렸는지 일찌감치 잎이 허옇게 말라붙었다. 꼬투리도 몇 달리지 않은 채다. 팥은 올해도 종자는 건질 것 같다. 밭장 선친께서 남기신 종자를 해마다 뿌리고 거둔다. 고구마는 여전히 순이 씩씩하다. 찬 바람 불기 전에 캐야 할 텐데 순이 아까워 미적미적 미루고 있다. 여름내 수확한 고추도 여전하다. 적어도 10월 말까지는 계속 수확할 수 있을 듯하다. 반면 주렁주렁하던 가지는 수명을 다한 듯싶다. 열매는 맺혔는데 더는 크지 못한다.

희한한 건 공심채(모닝글로리)다. 매주 거두는데도 자라기를 멈추지 않는다. 동남아 채소가 동북아에 완벽히 적응한 것 같다. 공심채만큼 왕성한 건 모기다. 여름 밭에서 더위만큼 사나웠던 모기는 더위가 물러간 뒤에도 사라질 낌새가 없다. 고추 몇 개 따다가 온몸을 다 뜯겼다.

 

깊어가는 가을, 전통주 아락을 기대하며

 

‘가을장마’라 할 정도로 비가 내리더니 날이 훅 차가워졌다. 거리에 두툼한 점퍼 차림이 늘었다. “무, 배추가 얼진 않겠죠? 갑자기 이리 춥다니… 여름 열매작물은 이제 보내줘야겠군요.” 막내가 주초부터 텃밭 걱정이다. 이번 주말엔 다들 모일 수 있을까? 큰형이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모셔온 전통주 아락이 출동을 기다리고 있다. 계절이 깊어간다.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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