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밭에 놀러온 지인이 퇴비간을 채워주고 있다.
어휴, 머리야. 환삼덩굴, 쿠카멜론, 돌콩이며 나팔꽃까지 온갖 덩굴이 아무 식물이나 잡고 자기들끼리 끌어안으며 휘감은 이 풍경이 밭인지 야산인지 모르겠다. 조금만 참으면 서리가 올 텐데 당분간만이라도 흐린 눈으로 넘어가야 하나, 아니면 정리해야 할까? 내일, 모레, 아니 주말로 차일피일 미루던 것이 밭을 이 꼴로 만들고 말았다.
이럴 땐 그냥 몸부터 움직여야 하는데 이미 생각에 생각을 너무 많이 해버린 지 오래. 이런 끝없는 게으름에 가장 강력한 특효약이 있다. 바로 누군가를 초대하는 거다. 마침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 퇴비로 활용하는 지인 중 한 명이 장기간 집을 비우는데다 주말농장도 끝나가 고민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조금의 고민도 없이 그에게 전화해 외친다. “그럼 제 밭으로 오시면 되겠네요!”
참 신기하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살아내며 그냥 밥 한번 먹기 위해 날짜를 정하는 건 참 어려웠지만 이럴 땐 날짜도 뚝딱 잡힌다. 풀매기도 그렇다. 누군가 놀러 오지 않는다면 끝내 미루다 안 했거나 고된 노동이 됐을 일이었는데 그리 번거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냥 하기 싫고 귀찮았던 생각은 쏙 들어가고 몸이 앞서 예초기를 돌리는 발걸음도 낫질하는 손길도 가볍다. 밭에 혼자 있거나 남편이랑 둘만 있을 때는 잘 나오지 않는 부지런함이다.
전보다 말끔해진 밭에 놀러 온 지인을 위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쿠카멜론, 고추, 가지도 남겨뒀다. 수확이 넘쳐나 누군가에게 나눠줘야 할 상황이 생기면 막상 귀찮아지는 게 사람 마음이었는데, 누군가 와서 내가 농사짓는 모습을 들여다봐준다니 작물 뿌리라도 뽑아 뭐라도 잔뜩 안겨주고 싶다. 이게 끝이 아니다. 내 밭의 퇴비간을 채워준 그에게 마지막 가지를 따 구워주고 연잎밥도 찌고 전날 묵도 쑤어 대접했다.
내가 해준 밥을 맛있게 먹은 그는 쿠카멜론을 오독오독 씹으며 “어, 정말 신기하다. 처음에는 신맛이 났다가 멜론 향이 나고, 결국 오이 맛이 나는데요?” 느낌을 나눈다. 솔직히 쿠카멜론은 밭에 두고 싶을 만큼 예쁘지만 식재료로는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오이보다 맛있는 것도 아니고, 피클 말고 다른 요리법도 잘 모르겠고. 지금처럼 다른 작물을 수확할 게 없을 때나 따 먹는 존재였는데 지인의 말에 쿠카멜론을 입에 넣어보니 향이 풍부하게 느껴진다. 밭에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건 바로 이런 거다. 농사에 대한 시야와 미각이 넓어지는 것! 그의 한마디에 앞으로 쿠카멜론을 조금 더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상상력이 퐁퐁 솟아난다.
이 초대의 준비가 며칠에 걸쳐진 것임을 그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밭에는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오랫동안 쌓아온 내 가치관과 일상의 큰 부분을 보이는 것이라 눈앞의 장면만 보고 내 농사에 대해 ‘잘했네, 못했네’ 판단하기보다는 내 마음과 지향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을 엄선해서 초대하게 된다. 그러니 이걸 보여주고 뭐라도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게 그저 감사할 뿐. 농민들의 밭에 취재를 가거나 놀러 갔을 때마다 그들이 내게 밥상도 차려주고 푸성귀도 따주던 건 바로 이런 마음이었겠지. 괜히 뭉클해진다.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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