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집 아주머니는 우리를 ‘농막집’, 나를 ‘새댁’이라 부르며 이것저것 살뜰히 챙겨준다. 남편과 나는 그분을 B언니(그분 성함)라 부른다. 스무 살에 낳은 첫딸이 나와 동갑이라 하니 실은 나보다 스무 살 위의 어른이다. 막국숫집 사장님이 B언니라 부르는 걸 듣고 “저도 언니라고 할래요” 했던 게 입에 그렇게 익어버렸다. 막상 대면해서는 언니란 말이 나오지 않아 모호하게 호명하지 않게 돼버렸는데, 우리끼리는 “B언니 B언니” 부르면서 정겨운 이름이 됐다.
얼마 전 배추를 심었다. 지난해 여름엔 옥수수 수확과 판매에 온 정신과 노동을 쏟아부었다. 올해는 B언니 덕에 운 좋게 ‘밭떼기’로 넘겨서 수고를 덜고 그만큼 마음의 여유도 생긴 김에 김장 배추 한번 심어보기로 했다. 강원도 산간 지역에선 8월15일 전후로 김장 무와 배추를 심고, 100일가량 키워 서리가 내리기 전에 수확한다. 우리가 배추 심기로 마음먹은 건 광복절 즈음. 유튜브에서 배추 심는 법을 찾아보니 밑거름을 주고 가스가 빠지도록 2주 정도는 뒀다 심어야 한단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아 일주일만 묵혔다 심기로 하고 그 주말, 농협경제사업소에서 가축분 퇴비 5포대를 사다가 가로세로 10m 정도 구획 짓고 뿌려뒀다.
우리의 농사 과외선생님 B언니가 다음주에 배추를 심겠다 하니, “모종이 다 들어갔을 텐데…” 하며 종묘상에 얼른 가보란다. 부랴부랴 진부 시내에 나가 돌아다녀보니 아니나 다를까, 배추 모종을 구할 수 없었다. 마지막 들른 종묘상에서 횡계에 가면 강릉으로 나가는 모종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해서 곧장 차에 올라 출발하려다가, 혹시 몰라 전화 먼저 해보니 거기에도 없다고 한다. 아, 퇴비 뿌리기 전에 알아볼걸. 이래서 모든 건 때가 있다고 하는구나.
주중에 B언니 전화가 두 번 왔다. “배추 모종 구했어? 내가 진부장에 가봤는데, 장에도 없대~.”
배추 모종은 결국 경기도 성남 모란시장에서 구했다. 진부에 내려간 금요일 밤, B언니가 저녁 마실을 왔다. 배추 모종이 멀칭(바닥덮기)한 비닐에 닿지 않도록 흙을 모종 둘레로 더 덮어줘야 한다고 가르쳐주곤 모종삽 필요하니 없으면 내일 빌려가라고 한다. 고라니 퇴치법도 알려줬다. 고라니는 머리 높이쯤에 뭔가 걸리는 게 있으면 넘어가지 않는다고 배추 심고 둘레에 줄을 치면 된다고 했다. 다음날 우리는 모종삽을 빌려다 배운 대로 배추 70포기를 심었다. 무 씨앗도 다섯 고랑쯤 심었다. 배추밭 둘레로 지지대를 박고 끈을 둘렀다. 일을 마치고 한숨 돌리는데 B언니가 고추 따러 갔다가 쉴 겸 들렀다며 배추 심은 걸 보고 갔다. “잘 심었네. 농사꾼 다 됐어~.”
다음주 금요일 아침, B언니가 전화했다. “이번주 오나? 아, 결혼식 간다고 했지. 내가 아침에 올라가 보니까 배추밭이 퍼~렇데. 밭이 질어서 가차이선 못 보고 멀리서 봤는데 퍼렇더라고. 잘되겠지” 한다. 옆에서 듣던 남편이 “배추도 온 마을이 키우는데?” 했다. 아니지. 배추농사는 B언니가 다 지어준다.
글·사진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네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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