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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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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구멍만 남긴다

등록 2022-04-23 18:07 수정 2022-04-26 11:47
1410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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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22년 2월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유를 스스로 꼽는다면, 열 가지도 넘을 것이다. 그가 몇 가지 이유를 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모두 변명, 핑곗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있은 지 두 달이 넘었다. 잔혹한 키이우 민간인 학살 현장이 하나둘 드러났다. 이 침공 자체, 더구나 수백 명의 민간인 학살은 명백한 범죄다. 이번호에선 조일준 선임기자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푸틴의 제노사이드(집단살해)를 ‘전쟁범죄’로 처벌해야 하는 이유, 국제사회 규약에 비춰 처벌될 가능성 등을 짚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크라이나는 많은 고려인이 사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김용희 <한겨레> 기자가 광주 월곡동 고려인마을을 찾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한국에 온 고려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갖가지 이유를 끌어대며 변명하는 이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사회에서, 이번만큼은 내 문장 하나를 굳이 더 보태기보다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더 전하고 싶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8일간 아이들과 함께 지하 피란 생활을 한 뒤 택시를 타고 폴란드 바르샤바로 탈출한 그림책 작가 올가 그레벤니크(36)의 글과 그림을 아래에 싣는다. 그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일기 형식의 사연이 최근 한국에서 <전쟁일기>(이야기장수 펴냄)라는 제목의 책으로 나왔다. 그는 남편과 어머니를 우크라이나에 남겨두고 떠나, 지금은 불가리아의 한 도시에서 난민으로 두 아이,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이야기장수 제공

이야기장수 제공

2022년 2월24일. 새벽 5시30분, 폭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 아이들과 우리의 배낭을 쌌다. (…) 내 그림들을 파일에 넣었다. 우리의 아늑한 집은 방공호가 되어버렸다. 창문과 문 위는 온통 십자가들이다.

*십자가: 폭격시 유리가 터지지 않도록 십자 모양으로 테이핑한 것

2월28일. 미사일이 옆집에 떨어졌다. 두려움은 아랫배를 쥐어짠다. 날이 갈수록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짧아진다.

3월1일. 지하 생활 6일 만에 우린 바퀴벌레가 되어버렸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폭파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개구멍을 파악하고 있다가, 곧장 기어들어간다. 음식은 가루 한 톨까지 다 먹어치운다.

3월3일. 전쟁 8일째 밤 이후 나는 도망가기로 결심했다. 누구와 그리고 어디로 떠날지도 정하지 않은 채. 그냥 핸드폰을 들고 택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대학 동기들이 도와주었다. 실제로 운영되고 있는 택시 연락처를 주었다. 전화를 걸어보니, 택시기사는 나우치카에 있다고 했다. (…) 20분 후 우리는 기차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서서 가게 되는 상황에 대비해 아이들의 배낭을 버렸다.

전쟁 첫째 날 내 아이들의 팔에 이름, 생년월일, 그리고 내 전화번호를 적어두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내 팔에도 적었다. 혹시나 사망 후 식별을 위해서. 무서운 사실이지만 그 생각으로 미리 적어두었다.

3월6일. 다음날 새벽 5시 우리는 바르샤바 시내에 위치한 Mercure 호텔에 도착했다. (…) 결국 겉옷만 벗은 채 쓰러져 잠들었다.

3월12일. 엄마는 우크라이나에 남기로 했다. 엄마는 하리코프(하르키우)에 외삼촌과 거동이 불편하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남았다. (…) 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저 ‘다 괜찮을 거야’라고 말할 뿐.

그리고 2022년 4월, 책 앞에 쓴 ‘작가의 말’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내가 이 일기를 적는 이유는 ‘전쟁 그만!’이라고 외치기 위해서다. 전쟁에는 승리자가 없다. 오로지 피, 파산,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의 커다란 구멍만 남는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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