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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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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 없는 전쟁터

등록 2022-03-08 15:00 수정 2022-03-09 02:14
1403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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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전쟁터다. 지하철역 승강장과 통로 바닥에는 매트리스와 스티로폼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싱글 매트리스 하나에 서넛이 다닥다닥 몸을 웅크리고 눕는다. 담요 한 장 겨우 덮고 잠을 청한다. 누군가는 아예 텐트를 쳤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의 지하철 도로호지치역. 포탄을 피할 방공호 삼아, 이곳 지하로 피신한 200여 명 가운데 대부분은 여성과 아이다. 나이 든 남성도 종종 눈에 띈다.

전쟁터 같은 피란 생활에도, 아이들은 해맑다. 장난감 자동차를 회색 바닥에 굴린다. 집에서 데리고 나온 개, 고양이와 장난을 친다. 그래도 아이들은 안다. 땅 위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홉 살 울리아나는 엄마와 고양이와 함께 이곳에서 엿새째 머물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튿날 집을 나왔다. 아이는 “그래도 여기가 바깥보다는 낫다”고 말했다. 이렇게 지하철역에 사는 시민이 1만5천여 명에 이른다. 키이우의 병원들은 저마다 지하에 대피공간을 만들었다. 산부인과병원에선 임신부가 지하에서 새 생명을 낳고, 어린이병원에선 엄마들이 아픈 아이를 안고 숨죽인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해 외신들이 전한 우크라이나 키이우 현지의 사진과 영상을 볼 때마다, 자꾸만 눈이 빨개진다.

전쟁은 범죄다.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뒤흔들려는 푸틴의 도박이, 우크라이나 시민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러시아군의 침공 일주일 만에 숨진 우크라이나 민간인이 2천 명이 넘고, 폴란드 등 국경을 넘은 난민이 100만 명 이상 생겨났다. 세계 곳곳에서, 심지어 러시아에서도 ‘노 워’(NO WAR), ‘반전’을 외치는 시민들의 애절한 목소리가 커지지만 끔찍한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는 앞서도 전쟁과 다름없는 혁명적인 상황을 겪었다. 광장에 모여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에게 ‘유럽연합 가입’ 서명을 요구한 시민들은 군봉으로 구타당하고, 총에 맞아 120명 넘게 숨졌다. 이같은 2013~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윈터 온 파이어>에서 증언한 한 여성 기자는 다큐 마지막에 울먹이며 말했다. “전세계에서 온갖 전쟁을 치르고 난 후에도,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서로를 죽이고 있죠.” 불과 8년 전인데, 또다시 전쟁과 죽음이 되풀이된다.

이곳도 전쟁터나 다름없다, 고 쓰려다가 멈칫한다. ‘총성 없는 전쟁’ ‘반도체 전쟁’ 따위로 무의식적으로 쓰던 ‘전쟁’이라는 단어를 앞으로 함부로 쓰지 않겠다, 고 새삼 마음먹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켜보면서.

제20대 대통령 투표일을 며칠 앞두고, 선거 국면이 급박하게 돌아간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과거 단일화했던 더불어민주당을 버리고, 국민의힘 편에 섰다. 윤석열-안철수 후보 단일화가 미칠 영향을 셈해보다가, 그만뒀다. 이전투구로 얼룩진 대선, 지나친 네거티브 공세와 막말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지기만 하므로. 그래도 ‘이런 대선, 처음이야!’ ‘역대 최악의 대선’이라고 한숨만 내쉴 수만은 없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호 표지이야기는 다시 대선 이야기다. 다만 대선 후보들이 주인공은 아니다. 선거에서 오로지 표 계산으로만 존재하는, 그래서 표가 안 되므로 대선의 주요 논의에서 소외된 20대 여성, 장애인, 빈민, 기후위기 활동가 등 25명을 인터뷰해서 대선 기간에 ‘지워진 목소리’를 담았다. 선거의 주인공은 후보들만이 아니라, 유권자이기도 하니까. 표로 셈되지 않는 이들에게도, 투표할 권리가 있으니까.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자 여러분의 목소리도 직접 듣고자 한다. 대선 기간에 말하고 싶었으나 답답해서 차마 하지 못했던 말, 다음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겨레21> 기자들이 직접 듣고 기록하겠다. 여러분의 참여를 기다린다(http://h21.hani.co.kr/arti/reader/together/51674.html).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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