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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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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싸움은 하지 않습니다

등록 2022-03-02 02:23 수정 2022-03-02 02:23

집안일에 허덕입니다. 주말에 밥 차리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유치원생 두 명을 돌보다보면 어느새 우울한 일요일 밤이 찾아옵니다. ‘집안일을 나름 할 만큼은 한다’고 생각하는 남편들이 더러 있는데 저도 그중 한 명입니다. 그런 생각을 내비칠 때마다 아내는 콧방귀를 뀝니다. “네가 집안일을 뭐 되게 많이 하는 줄 알지?”

2021년 늦가을이 무르익은 어느 날, 편집장과 팀장들이 모여 앉았습니다. 기사와 매체의 미래에 대해 아무 말이나 떠드는 그런 자리였지요. 그때 문득 스친 아이디어를 경솔하게도 내뱉고 말았습니다. “부부 3쌍 정도가 집안일하는 시간을 직접 재보는 실험을 하는 건 어때요? 설 특집호 아이템으로 괜찮을 거 같은데.”

제1401호 표지이야기 ‘돌봄의 무게- 부부 9쌍의 48시간 가사노동 기록’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설 특집호에 실험 참가자 모집 광고를 실었습니다. 설 연휴를 낀 10여 일간 참가자를 모집해, 설 연휴 직후 실험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속으론 불안했습니다. 이것도 엄연한 사생활인데 응모할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지원하지 않으면 ‘실패했습니다’라고 취재 후기나 쓸까, 그러면 면목 없으니 부부 3쌍을 따로 섭외해볼까 등등. 그런 걱정을 비웃듯 분노와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14명의 독자가 참가 신청서를 냈습니다. 그중 9명(부부 9쌍)이 배우자와 함께 평일, 주말 48시간 가사노동 시간 기록을 완성했습니다. 그들의 소감을 한번 들어볼까요?

“저는 이걸 하면 남편이 좀 생각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저희 부부가 가사노동 시간 차이가 가장 크지 않나요? 차이가 너무 많이 나니까 이게 정상적인 건 아니라는 걸 남편에게 일깨워주고 싶어서 신청했는데… 잘 안된 것 같아요.”(40대 맞벌이 가구 아내 A씨)

“아내가 집안일을 더 많이 하는 건 알고 있었어요. 집안일이 아내 몫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집안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알아서 좀 해야 하는데 귀찮아서…. 더 급한 사람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A씨의 남편 B씨)

“기록하면서 아내를 관찰해보니 제가 몰랐던 게 보이더라고요. 옷 정리 같은 사소한 것 정리하는 거랑 샤워하러 들어가서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나오는 거…. 아내가 생각보다 부지런히 집안일을 많이 하더라고요.”(40대 맞벌이 가구 남편 C씨)

“막상 시간을 기록해보니까 재밌더라고요. 둘 다 집안일을 엄청나게 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육아휴직 중인 30대 남편 D씨)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집은 피난처가 됐습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을 뿐 아니라, 학교·어린이집 등 외부 돌봄 기관이 일시 멈출 때마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가족에 넘겨졌습니다. 그 터널을 지나는 부부들의 가사노동 기록을 보며 이런 질문들을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안일의 주 책임자는 왜 여전히 여성인가.’ ‘여성의 집안일과 바깥일은 왜 서로를 갉아먹는가.’ ‘한 가족이 집 안팎의 일을 병행할 수 있도록 사회는 제대로 뒷받침하고 있는가.’

취재를 마치고 잠시 고민했습니다. ‘나도 아내와 가사노동 시간을 한번 재볼까.’ 지는 싸움을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차라리 자신과의 싸움을 하기로 했습니다. 요즘 집에 있는 동안 할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주제넘은 기획으로 이렇게 또 제 발목을 잡아봅니다.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작은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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