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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을 위하여

등록 2021-06-26 16:18 수정 2021-06-27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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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나오니 식당 숟가락이 무거워서 팔목이 아프더라고요.”

이탈리아 식당에서 만난 그가 감옥에서 쓰던 초록색 플라스틱 수저를 꺼내며 말했습니다. 개인적 신념에 따라 현역 입대를 거부한 병역거부자인 그는 1년6개월간 갇혀 있다가 한 달 전쯤 출소했습니다. 2018년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지 3년이 지났지만 그처럼 감옥에 갇히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현재 ‘여호와의 증인’ 신자 등 종교에 따른 병역거부 기준만 대법원이 제시했을 뿐, 윤리·도덕·철학적 동기 등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는 그 기준이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에 따른 병역거부는 잇따라 무죄 판결이 나오지만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는 ‘양심이 깊고 확고하며 진실한지’ 심사한다는 명목으로 수사·재판 과정에서 ‘괴롭힘’을 당합니다. 검찰이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 가정환경, 성장 과정, 시민단체 활동 이력 등을 뒤지고 “총을 들겠다”는 답변을 얻기 위해 온갖 질문을 던집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집총 행위를 한 것은 양심에 부합하는가?” “일본군이 성노예를 삼기 위해 지인 여성들을 데려갈 경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극단적 상황을 가정한 질문에 머뭇거리기라도 하면 ‘진정한 양심’이 아니라고 밀어붙입니다. 2021년 2월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 홍정훈(32), 오경택(33)씨가 징역 1년6개월을 확정받고 수감된 이유입니다.

변화의 조짐이 꿈틀거립니다. 6월24일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가 여호와의 증인 신자가 아닌, 개인적 신념에 따라 현역 입대를 거부한 병역거부자 시우(34·활동명)씨에 대해 처음으로 무죄를 확정했습니다. 성소수자인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남성성을 강요하는 폭력적 집단문화에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대학 입학 뒤 참여적인 기독교 단체에서 서울 용산 참사 집회,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고 ‘퀴어 페미니즘’도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1심은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습니다.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뒤 2심은 1심 판결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신앙과 신념이 내면 깊이 자리잡혀 분명한 실체를 이루고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검찰은 또다시 ‘5·18 민주항쟁 시민’이라는 가정적 질문을 내세워 시우씨가 ‘최소한의 공동체 방어를 위해 무장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이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며 진정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고 보기 힘들다고 반박했습니다(검찰 상고이유서). 하지만 대법원은 이날 무죄를 확정했습니다.

앞으로 시우씨는 36개월(현역 복무 기간의 2배) 동안 교도소·구치소 등 교정시설에서 합숙하며 급식, 청소, 시설관리 등 대체복무를 할 예정입니다. 병무청은 2018년 헌재 결정 뒤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상대로 한 고발을 멈춘 대신, 2020년 6월 대체복무를 판단할 대체역 심사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시우씨는 헌재 결정 전에 기소됐기에 대체역 심사위원회를 밟지 못했지만 대법원 무죄 판결로 대체복무가 가능해졌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옥죄는 인권침해적 수사와 재판을 멈춰야 할 때입니다. 헌재 결정 3년, 대체복무법 제정 1년6개월, 대법원 심사위원회 신설 1년, 과도기는 충분했습니다. 이제 대체복무의 길을 활짝 열어나가야 합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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