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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생리에 기뻐하던 짝꿍

등록 2020-10-17 06:11 수정 2020-10-20 08:01
1334호 표지이미지. 한국여성민우회, 사진가 혜영

1334호 표지이미지. 한국여성민우회, 사진가 혜영

엄마는 나를 낳고 두 차례 임신중단을 했다고 했습니다. 고조부모 제사까지 챙기는 장손 집에서 딸 둘을 연년생으로 낳고 나서 또 딸을 낳을까 두려웠답니다. 두 번째 임신중단 뒤 후유증이 커서 어쩔 수 없이 세 번째는 그냥 낳기로 했는데 ‘다행히’ 아들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서 전해 들은 ‘집안 대 잇기 성공담’이 임신중단에 대한 첫 기억입니다.

두 번째 기억은 고등학교 때입니다. 남자친구를 사귀던 짝꿍은 월경 때가 다가오면 안절부절못했습니다. 임신테스트기도 구하기 쉽지 않은 고등학생은 월경이 늦어지면 온종일 한숨만 쉬어댔습니다. 왜 피임을 하지 않느냐고 타박하다가, 임신이면 중절수술비를 보태겠다고 위로하며 불안한 날들을 함께 보냈습니다. 늦게라도 생리가 시작하면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몇 차례 고비를 넘긴 뒤 그는 결국 임신중단을 했습니다.

여성의 삶에서 임신중단은 흔한 경험입니다. ‘낙태죄’라는 족쇄 탓에 공개적으로 밝히는 게 드물었을 뿐 우리 곁에서 늘 맴돕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를 보면 2017년에만 우리나라에서 약 5만 건의 임신중절수술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도 낙태죄는 1953년 형법 제정 이래 67년간 그 생명을 유지하며 여성의 건강권과 자기결정권을 침해해왔습니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사라질 것이란 기대가 컸지만 섣불렀습니다. 정부는 10월7일 낙태죄를 유지하고 임신 14주 이내에는 조건 없이 임신중단을 할 수 있도록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정부안)을 내놓았습니다. 15~24주에는 지금까지 예외적으로 허용한 임신중단 사유에 ‘사회적·경제적 사유’가 있을 때를 더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는 임신 24주까지 △본인이나 배우자가 정신장애·신체질환,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준강간에 의한 임신 △혈족·인척 간 임신 등의 경우에 임신중단을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제1334호는 정부안에 반대하는 네 가지 시선을 담았습니다. 임신중단 경험자들과 헌재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이끈 변호사, 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고민하는 산부인과 의사, 낙태죄 완전 폐지를 담은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낸 국회의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낙태죄 폐지, 그 뒤’는 캐나다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88년 낙태금지법 위헌 선고로 이후 처벌 규정이 없어졌지만 캐나다의 전체 임신중단 건수는 늘지 않았습니다. 초기 임신중단이 활성화하면서 임신 20주 이후 임신중단이 거의 사라졌을 뿐입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공공병원 ‘BC여성병원’의 관계자가 말합니다. “우리 병원에서 1년에 분만 1만 건을 하는데, 20주 이후 임신중단 위원회가 열린 건 3~4건밖에 없었어요. 엄마의 건강이 위험한 경우, 태아가 복잡기형일 때요. 임신중단이 합법인 나라인데 20주 이후 임신중단을 결정하는 경우를 생각해봐요, 정말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을까요?”

법이 여성을, 의사를 신뢰할 때 일어나는 변화가 눈부십니다. 이제 우리도 이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덧붙임. 새로운 칼럼의 필진을 소개합니다(이하 호칭과 꼭지명 생략). 사회학자 엄기호는 사건의 종단을 되새기고, <한겨레> 기자 정의길은 이스라엘을 둘러싼 신화를 벗겨냅니다. 발달장애 아들을 둔 작가 류승연은 장애인에 관한 확증편향을 깨나가고, <한겨레> 기자 김양희는 야구에서 인생을 읽으며, 칼럼니스트 차우진은 콘텐츠 비즈니스의 흐름을 들여다봅니다. 앞으로도 독자의 의견을 들어가며 최고 필진으로 지면을 꾸리겠습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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