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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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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애도하기 위하여

등록 2020-07-18 04:34 수정 2020-07-18 05:38
1322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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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는 실종과 뜻밖의 성추행 피소, 그리고 섬뜩한 죽음. 인권변호사 6년, 시민운동가 16년, 서울시장 9년, 그의 찬란했던 역사는 한순간에 암흑 속으로 잠겨버렸습니다. 슬픔과 연민, 분노와 좌절 등 뒤엉킨 감정이 일주일 내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지난 10년간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되풀이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2009년)과 노회찬 전 의원(2018년)을 보냈을 때도 가족과 친구를 잃고 홀로 살아남은 사람처럼 죄책감에 주저앉았습니다. 그 트라우마를 껴안고 치유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또다시 혼란스러운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이번에는 ‘공소권 없음’이라는 다섯 글자로 모든 것이 덮이지 않고 그 선택의 원인과 과정이 규명되기를 바랍니다. 그의 빛과 그림자를 제대로 밝혀내지 않으면 사회적 후유증으로 남을 뿐 아니라 그를 끝내 떠나보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도를 위한 첫걸음은 언제나, 가라앉은 진실을 길어올리는 것입니다.

<한겨레21> 제1322호는 세 명의 광역단체장이 연루된 성폭력 사건을 관통하는 것들을 찾아봤습니다. 가해자로 지목된 지자체장들은 50대 이상 남성 정치인이며, 피해자는 젊은 여성 공무원입니다. 그중 두 명은 비서였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휴일도, 공사 구분도 없이 일하는 비서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지자체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기분 좋은 상태에서 원하는 답을 받아야 하는 고위 공무원이 앞장서 비서에게 ‘기쁨조’ 같은 역할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노(No)라고 할 때, 비서는 예스(Yes)라고 말해야’ 하며, 무슨 일이든 수행하고 비밀로 해야 한다는 철칙을 세뇌당하듯 교육받습니다.

한편 위계적인 조직문화에서 떠받들리는 지자체장은 점점 위력에 둔감해집니다. 과거 탈권위주의, 민주화운동에 몸담았더라도 끊임없이 자신의 권력을 성찰하지 않으면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위력에 대한 두려움이나 ‘심기 보좌’를 이성적 호감으로 착각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위험신호가 울려대는데도 조직은 모른 척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지자체장과 ‘운명 공동체’인 비서실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지자체장에게 누가 된다고 생각하는 탓입니다. 또한 그 일로 자신들의 평판과 나아가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기에 덮기에 급급합니다.

공무원 사회에서 성추행은 일상이라는 점, 대부분 참고 넘어간다는 점도 ‘묵인·묵살’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입니다.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이 2018년 10월 공무원 6810명을 대상으로 한 ‘성평등 및 성희롱 실태조사’의 결과보고를 보면, 응답자 23.9%가 “지난 1년 동안 주위 동료직원이 성희롱을 당하는 것을 보거나 들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의 66.1%는 “참고 넘어갔다”고 합니다. 성희롱을 조직이 아닌 개인의 문제로 취급하며 적절하게 처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입니다.

그러나 권력형 성범죄가 개인이 아니라 권력의, 조직의, 구조의 문제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참담한 현실을 우리는 지금,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제 슬픔을 딛고 나아가야 합니다. 고통 속에 용기 낸 피해자와 연대해 철저한 조사로 진실을 밝히고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겨레21>은 힘을 보태겠습니다. 그것이 원순씨가 평생 일궈온 가치와 철학, 그리고 발자취를 지키는 길이리라 믿습니다. 가해자로 지목되지 않은 채 우리 곁에 있었다면 그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요.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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