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살림을 짜는 일은 세금을 얼마나 걷는지와 함께 우리나라에서도 어느새 경제 이념전의 축이 되었다. 작은 정부냐 큰 정부냐는 대치 전선에서 어느 편인지 가르는 기준선이 되었다. 적은 예산은 작은 정부를, 많은 예산은 큰 정부로 통한다. 이 격전장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치와 언론은 앞장서 침을 튀기며 싸운다. 그 치열한 전투에 비해 ‘적은’ ‘많은’ ‘큰’ ‘작은’의 구분은 놀라우리만치 모호하다.
절대적 기준선이 없으니 상대편을 기준으로 임의로 구분된다. 과거와 제3자가 경계선이 될 때도 있으나, 이미 정해진 상대가 편을 가르는 기준선이 되기 일쑤다.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세상 싸움판이 대개 그렇듯이. 더구나 예산이란 자원을 어디에 얼마나 어떻게 배분할지 권한을 쥔 정치권력의 교체와 맞물려 이념전은 증폭되곤 한다.
일본이 선포한 경제·역사·외교 전쟁을 중계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를 위시한 보수지와 경제지들은 내년도 예산안으로 전선을 넓혔다. 2020년 정부 예산안을 놓고 이뤄진 당정 협의에서 흘러나온 수치를 갖고서 ‘초슈퍼 예산 추진’이란 제목 아래 가파른 증가를 비판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경기가 안 좋아 세수도 적을 판에 선심성 복지와 총선용 예산을 크게 늘리려 한다는 얘기다. 현 정부가 큰 정부를 지향해선 안 된다는 경고사격성 기사이기도 하다.
실제 어떤가. 우리나라의 정부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과 한번 비교해보자. 우리나라의 정부 크기(OECD 기준 정부총지출-General Government Spending)는 1996년 이 기구 가입 뒤 2007년까지 꼴찌였다. 11년이나 가장 작은 정부의 신화를 유지했다. 2016년(우리나라 가장 최근 통계) 기준 36개 회원국 중 칠레, 아일랜드, 콜롬비아 다음으로 경제 크기에 견줘 나랏돈을 적게 푸는 여전히 작은 정부다.
싸움은 때론 비신사적이다. 적을 때려눕히기 위해 기준선은 가끔 조작되고 왜곡된다. 눈속임은 점잖은 편이다. 언론과 전문가들은 주식시장이 폭등했을 때 지수가 얼마나 올랐는지 %로 보여주지만, 폭락했을 때는 유독 ‘수조원이 증발했다’는 표현을 골라 쓴다. 떨어졌을 때 전달 효과를 키우기 위해 액수를 적는다. 이런 유혹은 숫자를 다루는 세계 어디서나 도사리고 있다.
정부 지출은 2005년(‘e-나라지표’에서 확인 가능한 본예산 기준 총지출)부터 단 한 번 예외 없이 해마다 늘었다. 다른 기준(총지출이 아닌 통합재정)으로 시야를 좀더 넓히면 1970년대부터 2018년까지 2002년, 2010년 딱 두 번을 빼면 나라살림은 매년 늘었다. 경제가 계속 성장했기 때문이고, 혹 경제가 뒷걸음치더라도 시장 실패를 정부가 나랏돈을 풀어 보완하기 때문이다. 돈의 가치가 거의 해마다 떨어지는 인플레이션까지 고려하면 금액을 기준으로 정부 살림살이가 커지는 것은 당연한데 숫자를 더하기 빼기 하면서 실상을 호도하는 경우가 있다. 예산이 몇 년 새 수십조원 늘었다는 식으로 재정 파탄 불안을 부추기는 기사는 때마다 나온다.
외환위기 이후 최근까지 경제 크기를 보여주는 국내총생산(GDP)에 견줘 재정 비율은 평균을 내보면 21% 수준이다. 소폭 등락해왔을 뿐 크게 줄거나 늘지 않았다. 주요 선진국에 견줘 나라 가계부(재정수지, 국가채무)도 건전한 편이다.
그런데도 가정법을 곁들여 뽑아낸 숫자를 내세워 겁박한다. 510조+알파, 530조, 400조원에서 3년 만에 500조원으로, 2년간 70조원 증가… 숫자는 이념전에 객관적 외피를 씌워준다. 또 복잡한 ‘작은 정부론’을 단순화해주는 힘을 지녔다. 강력한 선전 도구이면서 검증하고 반박하기 쉽지 않은 탓에 언론과 정치권 그리고 이론을 공급하는 전문가들은 숫자를 더욱 애용한다. 사실 조작과 왜곡, 눈속임을 곁들이지 않는 ‘숫자 윤리’면 족하다. 가치와 이념의 내피를 두르지 않은 숫자는 없지 않은가. 이 글도 그렇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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