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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읽는 뉴스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9-08-13 07:59 수정 2020-05-03 04:29

아침에 아내가 말을 걸 때만 해도 흘려들었다. 둘째 딸이 이상한 얘기를 들려줬다 하길래 그런가보다 했다. 마감날인지라 아침부터 마음이 쫓겼다.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직 어린 딸이 별 의미 없이 한 얘기란 생각도 들어 더는 묻지 않았다.

출근해 모니터에 눈을 고정한 채 부지런히 기사를 읽는데, 이른 오후 둘째한테 카톡이 날아왔다. 먼저 말을 거는 법이 거의 없는 아이의 수상한 행동이었다. ‘아빠는 이런 건 알아?’ ‘관심 좀 가져주세요’란 제목의 글은 중학생 딸에게 자못 심각했다.

“얘들아 우리나라 지금 심각해. 우리나라 기업 주식 1900까지 내려갔고 1300까지 돌파하면 제2의 IMF야. 근데 문재인이 지금 이걸 국민연금으로 구멍 난 경제를 막고 있어… 우리가 불매운동한다고 해서 일본한테 타격이 가긴 하겠지만 일본이 우리한테 타격을 주면 우리가 입는 피해는 엄청나… 심지어 문재인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미국과 대한민국은 동맹국가가 아니라는 발언을 했고 오늘 북한이 미사일 또 쐈어.”

딸은 페이스북에서 이 글을 봤단다. 글이 어땠는지 물으니, 충격적이란다. 왜 그런지 물었더니, ‘우리나라가 저런 상태’인지 몰랐단다. 사실이라고 믿는지 묻자, 그렇단다. 진짜 같단다. 아이가 사실이라고 믿는 근거는 아이 수준에 확 꽂힌 대목이 있어서다. “근데 지금 이거 이슈 되는 거 막으려고 강다니엘-지효, 모모-김희철 해서 열애설 막 터뜨리는 거래….”

유포된 글의 끝자락인데, 딸은 이 부분은 자신 있는지 콕 짚은 뒤 맞는 말이 너무 많다고 자신했다. SNS에서 빠르게 퍼진 어느 얄팍한 어른의 글이지만 세상사에 서툰 아이들을 선동하기엔 충분했다. 엉터리 글이지만 삼각 축의 중심은 잘 잡고 있었다. 문재인, 북한, 일본.

이틀 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책을 산 뒤 회사로 돌아오는 전철을 탔다. 퇴근길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파도 속에서 휠체어 리프트를 타고 광장으로 나가려는 한 어르신이 눈에 띄었다. 휠체어 한쪽엔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구출하겠다는 우리공화당(옛 대한애국당)의 깃발이, 다른 쪽엔 성조기가 꽂혀 있었다. 아마 이날 우리공화당이 광화문광장에 기습적으로 설치한 천막 4개 동으로 향하는 듯했다. 이 당의 누리집엔 엄중한 시국 선언문이 걸려 있다. “국익과 민생도 안중에 없는 좌파독재정권이 반일을 선동하고 친북을 선전하며 반미까지 부추깁니다. 결국 자유민주주의 동맹을 붕괴시키고 대한민국을 장악하겠다는 시대착오적 민족주의에 빠진 친북좌파 세력의 무섭고 치밀한 음모인 것입니다.” 격문은 페이스북에서 아이들에게까지 퍼진 가짜뉴스와 마찬가지로 문재인, 북한, 일본의 삼각 축에서 맴돌았다. ‘반문’은 공진 현상을 일으켜 ‘반북’과 ‘친일’을 증폭한다.

‘엄마부대’ 대표는 그 절정을 보여준다. “아베 수상님, (한국의) 지도자가 무력해서, 무지해서 한-일 관계의 모든 것을 파괴한 것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8월1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아베를 향한 그의 사죄는 반북과 반문의 샴쌍둥이다. “문재인 정권은 일본 정부에 사과하라”는 그의 외침은 ‘반일 감정 조장은 대한민국 공산화 전략’이라는 구호로 귀결된다. 8일 소녀상 앞에 자리잡은 그와 엄마부대 회원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에 사과하고 하야해야 한다고 또 힘을 내 소리친다.

아이들을 홀리는 가짜뉴스 유포자, 시대에 뒤떨어진 극우정당 지지 노인, 적의 적을 친구로 삼는 황당한 단체의 대표. 한 줌 같지만 이들은 해방 후, 아닌 해방 전부터 기득권을 누려온 집단에서 뻗어나온 가지다. 해체하지 못한 냉전과 매듭을 풀지 못한 과거사는 일본에서는 아베를 낳았고, 한국에선 이들을 낳았다. 아베와 이들은 해방 전 하나였던 것처럼 74년이 지난 지금 다시 공명하고 있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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