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국방예산은 아무도 시비 걸 수 없는 성역이었다. 한·미 합의로 GNP의 6%를 무조건 국방비로 배정해야 했다. 이런 판국에 처음으로 국방예산도 삭감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현역 장성들이 권총을 찬 채로 당시 문희갑 예산실장을 찾아와 소란을 피웠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전두환 대통령은 해당 장성들을 즉각 한직으로 좌천시켰다. 그리고 예산실장에게는 소신껏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예산편성 때마다 온갖 압력에 시달려야 하는 예산 당국에 확실한 신뢰와 함께 큰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읽은 지 몇 년 지나니 430쪽이나 되는 책 에서 기억에 남는 거라곤 이 일화 정도다. ‘전두환 대통령의 재정건전성 확립 의지에 얽힌 일화들’이란 소제목 아래 소개된 얘기 가운데 하나다. 독재정부에서나 민주정부에서나 포퓰리즘에 맞서 나라 곳간을 지켜왔다는 예산 관료들의 자긍심이 엿보인다. 한 세대 전 일이지만 예산 관료들의 몸속에 지금도 유전되는 DNA란 생각이 들었다.
다음해 예산을 짜는 데 기본 틀을 정하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기획재정부 공무원들에게 ‘국가채무 비율 40% 근거가 뭐냐’고 따져 물었다는 게 알려졌을 때도 그 일화가 다시 떠올랐다. 경제가 어려운데도 나랏돈을 푸는 데 왜 이리 보수적으로 구냐는 대통령의 답답함이 그 짧은 질문에 담긴 듯 보였다. 수치는 나랏빚이 1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부가가치의 총합이라 할 수 있는 국내총생산(GDP)에 견줘 40%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마지노선을 의미한다. 권총의 위협에도 곳간을 지켜냈다는 일화는 오랫동안 신화로 유통됐고, 이제는 수치화됐다. 방귀깨나 뀐다는 이들이 요즘 이 수치를 갖고서 한창 입씨름했다. ‘40% 룰’은 크게 문재인 정부 지지 여부, 경제적 이념의 보수성과 진보성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구도로 나뉘어 토론되는 편이다. 대통령의 문제제기 뒤 경제부총리가 2022년 말 국가채무 비율이 45%까지 오를 수 있다고 전망하자 논쟁은 한층 뜨거워졌다.
현 정부를 지지하지 않거나 보수 성향인 논자는 40% 룰에 호의적이다. 정치적 보수 쪽을 대표하는 자유한국당은 법으로 이를 못 박자는 황당한 주장까지 한다. 보수 언론과 학자들은 재정·부채·채무란 말 뒤에 흔히 폭탄이나 파탄을 붙이고 나랏빚 둑이 무너졌다고 난리다. 되도록 큰 숫자를 끄집어내 불안을 키우기도 한다. ‘나랏빚 1700조’(D3 기준·공공부문 부채)가 대표적이다. 40% 룰의 전제이자 국제 비교의 표준이 되는 국제통화기금(IMF) 기준(D1 기준·정부가 직접 상환 의무를 지는 확정 채무)에 4대 연금의 잠재 부채와 공기업 부채까지 포함해 산출한 엉뚱한 수치를 내세워 혼란스럽게 빚 공포를 퍼뜨린다.
이쯤 하면 40% 룰의 근거가 궁금할 법하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나마 다른 기준과 목적으로 국가채무 상한을 둔 곳이 있긴 하다. 유럽연합(EU)은 국가채무 ‘60% 룰’(D2 기준·일반 정부 부채)을 정하지만, 유로화란 단일통화의 가치 안정을 위해서다. 국가채무 비율이 높을수록, 특히 외채 비중이 클수록 국가부도(파산) 위험도 커지지만 비례 관계는 아니다. 1974년 22.4%였던 국가채무 비율은 1997년 한 자릿수 대까지 떨어졌지만,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를 맞았다. 외채가 많았고 상환 능력이 떨어져서다.
지난해 우리나라 국가채무 비율은 35.9%였다. 38.2%였던 게 국민계정을 개편해 국내총생산이 늘어나면서 채무 비율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긴축재정론자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지만, 40% 룰은 언제든지 재정 확대를 걸고넘어질 도깨비방망이다.
국가채무 비율만 놓고 보면 일본은 우리의 6배, 미국은 3배 높지만 파산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도 속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의 평균 국가채무 비율은 110%를 넘는다. 빚을 늘리자는 말이 아니다. 재정건전성이란 외피를 쓴 신화나 다름없는 40% 룰에 빠져 정작 필요할 때 나랏돈을 충분히 풀지 못할 수 있다. 곡식을 쌓아두고도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나눠주지 않는다면 나라 곳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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