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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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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씨의 미래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9-01-12 12:49 수정 2020-05-03 04:29

미국 뉴욕에 갔을 때 일이다. 차량 공유 서비스인 우버를 잡았다. 방글라데시 출신 대학생 운전사와 수다를 떨었다. 대화에 정신이 팔렸던지 청년은 길을 잘못 들었다. 유엔본부를 가는데 걱정했던 대로 요금이 예상보다 두 배 더 나왔다. 청년은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했다. 집으로 돌아와 우버에 항의했더니, 초과 요금을 돌려줬다. 모든 게 간편하게, 그것도 깔끔하게 처리됐다.

몇 년 전 미국에 잠시 머물 동안 택시는 거의 타지 않았다. 필요할 때마다 휴대전화 앱으로 우버를 이용했다. 팁을 주지 않아도 되는데다 요금도 쌌다. 운전자의 이름과 얼굴, 차종도 알 수 있었고 운행 기록도 남았다. 말로 목적지를 설명할 필요도 없었으니 영어를 못하는 나에겐 그야말로 딱이었다. 이 편리하고 안전한 서비스가 한국에서는 밀려났다. 택시 업계의 생존권을 위협한다는 이유였다.

19년째 택시 단골이다. 거짓말을 보태면 택시 요금으로 집 한 채를 살 정도로 많이 타고 다녔다. 일이 늦게 끝날 때가 많은데다 짧은 시간에 취재 현장에 도착해야 하는 직업 탓이 컸다. 이 글을 쓰고 나서 새벽 2시께 또 택시를 탄다. 2주 전, 그 시각 처음으로 카카오택시를 탔다. 언제 올지 모를 택시를 기다리며 추위에 떨지 않아 좋았고, 목적지를 굳이 말하지 않아 좋았다. 한마디로 편리했다. 콜택시 업체들이 얼마나 살아남았는지 잠시 궁금하기도 했으나, 앞으로 더 자주 카카오택시를 이용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좀 천천히 가주세요” “시내로 해서 가주세요.” 택시를 타자마자 버릇처럼 뱉는 말이다. 늦은 시각, 강변북로와 동부간선도로를 130㎞로 내달리는 택시를 타면서 ‘제발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상황이 싫어서다. 날아다니는 택시에서는 불편해서 피곤한데도 잠조차 잘 수 없다. 기어이 지난주 탄 택시의 운전사 T씨가 불평을 쏟아냈다. “강변북로로 갔으면 이 시간에 벌써 도착했을 텐데….”

그의 불평은 뜬금없이 정부에 대한 성토로 옮겨갔다. 카카오가 카풀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줘 택시 업계가 말라 죽겠다면서 육두문자를 썼다. 그리고 장시간 노동에 얇은 지갑, 택시의 과잉, 사납금 등 귀에 익은 하소연을 이어갔다. 그런데도 승차 거부, 난폭 운전, 불친절 등을 이유로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시민들이 자신의 편이 아니란 걸 알았다.

영업용 택시를 운전하는 그는 정부와 카카오를 욕하면서도, 카카오가 카풀 서비스를 본격화하면 경쟁력 없는 택시를 접고서 카풀 기사로 등록해 돈을 벌 생각이란다. 많은 이들이 자신과 비슷한 계획을 품고 있다고 전했다. 먹고사는 현실 앞에서 자기모순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T씨는 얼마 전 기사식당에서 만난 어느 고령의 개인택시 운전사의 말을 전했다. “카카오 본사를 찾아가 확 불 질러버리고 나도 죽어버릴 거야. 살 만큼 살았으니.” 그다음날 다른 택시 운전사가 여의도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질러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선 섬뜩했단다. 앞으로 몇 사람 더 죽어나갈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한 달 만인 1월10일 택시 운전사가 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T씨의 불길한 예감은 점차 현실이 되어간다.

하지만 아직도 여론은 카풀 편이다. 편리성 때문이다. 카풀로 가는 건 막을 수 없는 대세처럼 보인다.

그래도 그 편리성을 이유로 많은 사람이 생계를 뺏긴다면, 편리성은 재고되고 때론 양보되거나 유보되어야 한다. 공유경제, 혁신, 소비자 편의 등 화려하고 미래지향적인 가치들이 심지어 생명을 뺏는다면, 가치의 자기모순일 뿐이다. 죽음의 행렬은 멈추게 해야 한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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