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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8-11-24 16:20 수정 2020-05-03 04:29

늦손주가 어찌나 예뻤는지 할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화상통화를 하셨다. 아이가 첫돌 지날 무렵에는 걸음을 떼는 게 느리다고 괜한 걱정을 하시더니, 두 돌 즈음엔 말이 늦다는 새 얘깃거리를 찾으셨다.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던 아이는 때가 되니 말도 늘었다. “하배~” 아이의 대수롭지 않은 외마디에도 할아버지는 감탄사를 남발했다.

두세 단어로 서툰 문장까지 제법 꾸며낼 줄 아는 아이는 얼마 전 엄마와 아빠를 깜짝 놀라게 했다. “무서워!” 아파트 같은 동 1층에 있는 어린이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발버둥 치던 아이가 뱉어낸 한마디. 그 순간 놀란 엄마는 발걸음을 돌렸다. 8개월 넘는 시간, 아이는 어린이집 현관 앞에서 엄마와 헤어질라치면 울부짖곤 했다. “선생님이 싫어? 선생님이 때리니….” 엄마와 아빠 심지어 언니들까지 나서서 말이 서툰 아이한테 왜 어린이집에 가기 싫은지 묻고 또 물었다. 단서를 찾지 못한 부모는 결정을 유보한 채 아이의 절규를 듣고서야 움직였다. 너무도 미안했던 엄마와 아빠는 그날 대책 없이 어린이집을 끊어버렸다.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은 규모는 작았지만 주변 사립유치원의 아지트로 보였다. 아내와 함께 우는 아이를 원장에게 넘기던 어느 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린이집 거실에 앉아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학부모인가 싶었는데, 아내는 동네 어린이집 원장들의 얼굴을 알아챘다. 때는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가 자신들의 속내와는 다른 ‘사립유치원 공공성 강화를 위한 대토론회’란 이름의 ‘집단시위’를 벌이기 하루이틀 전이었다. 왠지 은밀한 현장을 포착한 느낌이었다. 아이의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은 누구 편인지 의문이 생겼다. 좀더 투명한 어린이집 운영을 바라는 나 같은 부모가 보기에 한유총은 ‘아이 편’인지 의심스럽다. 하기야 한유총은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0월 초 유치원 비리 근절을 위한 정책 토론회를 열었을 때 이를 무력으로 방해했다. 11월19일부터는 이른바 ‘박용진 3법’ 철회를 요구하는 릴레이 1인시위를 벌였다. “아이들을 위해 써야 할 돈이 엉뚱한 데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한 법”이라는 박용진 의원의 3법(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을, 한유총은 사유재산권 침해 등의 이유로 결사반대다. 박 의원은 “우리 아이들이 좋은 음식을 먹고, 양질의 교육을 받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유치원을 만드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자는 입장문을 내놨다.

좋은 음식, 양질의 교육,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유치원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당분간 그저 믿고 맡길 만한 어린이집을 찾기도 쉽지 않다. 임신육아종합포털인 ‘아이사랑’에서 두 군데 입소 대기를 걸어놨지만, 아내 지인이 소개해준 한 곳은 미인증 어린이집이란 걸 알고서 대기를 취소했고, 다른 한 곳은 대기 순번이 늦어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내년 3월에도 입소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답을 줬다. 아파트 단지 내 또 다른 어린이집도 있지만, 소문이 좋지 않아 늘 자리가 비어 있다. 600m 떨어진 곳에 있는 국공립어린이집은 아동 대비 교사가 많고, 평균 근속연수가 4년 넘는 교사가 절반을 넘을 만큼 양질의 교육 환경을 갖춰 대기를 걸어놨지만, 내년에도 입소가 어렵다.

아파트 건너편 둘째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병설 유치원이 있다. 큰애와 둘째 모두 이 유치원을 나왔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만 3세 반은 여전히 없다. 공간 부족을 이유로 만 4~5세 반만 운영한단다. 이뿐 아니라 사립유치원이나 어린이집보다 일찍 끝나는 것도 1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가까운 다른 초등학교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유치원이 아예 없다. 학교는 “교실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댔다. 만 3세 반이 있는 또 다른 병설 유치원을 찾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통원버스가 없으니, “통학 거리를 감안하여 등·하원에 지장이 없는 구역”의 유아들만 모집했다. 주변 국공립유치원은 들어갈 틈새를 찾기 어렵다.

10년 전보다 국공립어린이집과 유치원이 늘었지만 믿고 맡길 만한 곳에 아이를 넣기가 그때보다 나아졌는지 체감하기 어렵다. 가뜩이나 몸이 좋지 않은 아내는 집에서 애를 돌보면서 겨울을 나야 할 판이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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