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요금 50원이던 시절, 완행버스를 타고 황토색 먼지 휘날리는 신작로를 한참 내달렸다. 정류장에서 내려 다시 작은 걸음으로 한 시간 남짓 참아내야 닿을 수 있었던 엄마의 고향 집. 외갓집은 어린 나에게도 늘 좋았다. 재미 중 하나는 단연 낚시였다. 외가에서 또 걸어서 30분쯤 떨어진 곳에 저수지가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낚시터로 향했다. 작정하고 따라나서거나, 도시락 심부름을 할 때면 외손자에게 낚시를 가르쳐주셨다. 아주 가끔 저수지에서 낚은 잉어를 소쿠리에 담아 자전거에 싣고서 우리 집까지 가져오셨다. 엄마는 양은 솥에 잉어를 푹 고아 귀한 약처럼 드셨다. 생전 외할아버지는 낚시 아니면 끽연이었다. 도무지 말이 없었다. 얼마나 큰 상처가 할퀴어서 그랬는지. 3·1운동이 있던 해 태어난 그에게 운명은 참 기구했다. 20대 청년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일본으로 끌려갔다. 강제징용이었다. 해방되자마자 고국으로 돌아오던 길, 배가 풍랑에 뒤집혔다. 뗏목에 의지해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산 사람은 혼자였다고 한다. 일본 땅에서 어떤 학대와 수난을 당했는지 그는 자식들에게조차 들려주지 않았다. 자녀는 그가 어디에서 노역했는지 모른다. 군함도인지 아니면 미쓰비시중공업인지,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인지….
이춘식 할아버지는 1941~43년 일본제철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기술, 신체검사, 군대, 쇳물, ‘벤또’, 기숙사, 기상 나팔 소리…. 휠체어를 탄 아흔넷 어른의 기억은 이어질 듯하다 끊어지고 다시 숨차듯 힘겹게 이어졌다. 소송을 함께 냈던 세 분은 회견장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연신 감사하단 말을 뱉으면서도 “나까정 네 사람인디, 오늘 혼자 재판을 받고 한 게 많이 아프고, 눈물도 많이 나고 서럽고 기분이 안 좋소”라고 했다. 이날 10월30일, 대법원은 그가 13년 전 낸 소송에 마침표를 찍었다. 1억원 배상 판결이 났지만 어찌 75년 묵은 한이 풀리겠는가. 여전히 배상할 뜻이 없는 일본 기업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돈을 건넬지도 의문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없었다면 김규수 할아버지 등 몇 분이 더 살아남아 재판을 지켜봤을지 모른다. 양승태의 대법원은 박근혜의 청와대와 강제징용 판결 지연(혹은 파기)을 위해 뒷거래한 의혹을 받고 있다. 대법원은 법관 해외 파견 자리를, 청와대는 매끄러운 한일 관계를 원했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이후 강제징용 피해에 침묵해온 국가가 마침내 주권자인 국민을 배반한 역사다.
‘원죄’가 있는 전범국 일본은 염치조차 없다. 판결이 나자 일본 정계와 재계는 합창하듯 우려와 항의, 비난 심지어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깨끗한 거리와 질서, 고품질 전자제품과 장인정신, 높은 소득과 검소함 등 배울 점이 많은 나라이나 아직도 ‘역사 후진국’이다. 큰 죄를 짓고도 죄의식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깔끔하게 잘 차려입은 부자라도 철면피에 불과하다. 전쟁범죄를 반성하지 못하고 책임지지 않는 부자 나라 역시 다르지 않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독일은 일본과 달랐다. 2000년 ‘기억, 책임, 미래 연방재단’을 설립해 나치 독일의 강제노동을 보상했다. 우리 돈으로 6조원이 넘는 기금을 마련해 2007년까지 165만 명에게 보상금을 줬다. 이 보상에 앞서 서독은 이스라엘과 11개 서방 국가, 소련, 폴란드, 대독유대인청구권회의 등에 수십 년 동안 천문학적 액수의 전쟁배상금을 지급했다.
일본은 한일협정으로 강제노동에 대해서도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수십 년째 되뇌고 있다. 이제는 피해국에 되레 역정을 낸다.
‘기억, 책임, 미래 연방재단’을 띄우기 전 요하네스 라우 독일 전 대통령의 성명과 너무 대조된다.
“노예노동과 강제노동은 단지 받아야 할 임금을 뺏긴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납치, 근거지 상실, 권리 박탈과 잔인한 인권유린을 뜻한다. …저는 독일의 지배하에서 노예노동과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던 모든 사람을 기억하며 독일 민족의 이름으로 용서를 구한다.”
외할아버지는 일본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도 한 푼의 돈도 받지 못한 채 1991년 하늘나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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