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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주의란 DNA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8-07-04 11:53 수정 2020-05-03 04:28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있다. 차로 자주 지나는 이 교회의 정문 앞에 얼마 전 펼침막이 걸렸다. ‘6·25 상기 & 나라를 위한 금식기도회’. 어릴 적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던 ‘잊지 말자 6·25, 때려잡자 공산당’이 절로 떠올랐다. 오래된 ‘뽕짝’ 느낌의 슬로건을 내건 구국기도회는 교회 한 곳의 행사가 아니었다. 자치구 내 교구협의회와 구청의 합작이었다. 6월24일 열린 기도회에 참석한 참전용사와 유가족에게는 백미 20kg이 전달되고 교구협의회 소속 목사와 성도들은 전쟁의 의미를 상기하는 뜻으로 한 끼를 굶었다.

펼침막이 내걸린 교회에서 불과 수백m 떨어진 또 다른 교회. 수십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대형 교회에서 지방선거를 앞두고 6월2일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초청 주체는 기도회를 주관한 교구협의회였다. 장소를 내준 교회도 교구협의회 소속이다. 교회들은 표를 얻으려는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구청장 후보 2인을 앉혀놓고 궁금한 걸 따졌는데 양심적 병역거부가 동성애와 함께 핵심 주제였다. 교회 쪽 입장은 분명했다. 양심적 병역거부 반대다. 토론회가 열린 교회의 당회장(목사)이 대표회장을 했던 한국기독교연합은 이미 한 달 전 양심적 병역거부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내놨다.

6·25 상기 금식기도회를 열고 양심적 병역거부 허용을 반대하는 보수 개신교에는 ‘국가주의’란 DNA가 심겨 있다. 밥까지 굶어가며 하는 기도회는 ‘나라를 위해서’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서’다. 자나 깨나 나라 걱정은 병역거부를 반대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한국기독교연합은 양심적 병역거부가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라고 본다. 많은 보수 개신교가 드는 반대 논거는 ‘안보 위기’ ‘국가적 혼란’ ‘대한민국 존립에 심각한 위험’ 등이었다.

나라의 존립을 걱정하는 이들의 바람과 달리 헌법재판소는 6월28일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 도입을 결정했으니, 교회의 안보 걱정은 더 커질 수밖에 없겠다.

이처럼 국가주의와 결합한 보수 개신교는 자기모순을 배태하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 불인정은 인권뿐만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면이 존재한다. ‘하나의 신앙’이 국가 안보를 이유로 ‘또 다른 신앙’의 자유에 대한 억압을 옹호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결과적으로 보수 개신교가 국가의 이름으로 신앙의 자유를 훼손하는 꼴이다. 이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 제20조와도 맞지 않는다.

보수 개신교의 국가주의 DNA는 시민권이 없는 난민을 향한 혐오에서 더욱 공격적이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수백 건의 난민 반대 청원은 제주 예멘 난민을 이슬람 난민으로 재정의하고, 나라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라며 이방인 추방을 요구한다. “대한민국을 이슬람에 넘겨주려고 하냐”라는 청원은 더 이상 의문이 아니라 이교도한테 나라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십자군 전사’의 출사표처럼 들린다. 난민을 포함한 이슬람 이주민은 국가란 울타리 밖으로 몰아내야 할 적으로 간주된다. 최근까지 경남 지역에선 매월 ‘이슬람 저지 연합 집회’가 열렸다. 기도집회를 알리는 작은 책자에 ‘이슬람 박멸을 위한 기도문’이란 표현이 버젓이 담겼다. 이들이 말하는 이슬람은 결국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슬람 박멸 구호는 ‘제노사이드’(집단학살) 위협이나 다름없다.

성경에서 낱말 하나만 남기라면 사랑이 남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국가주의 보수 개신교에는 난민도 양심적 병역거부도 사랑이 아닌 증오의 대상이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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