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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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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임을 위한 행진곡

등록 2018-05-23 10:28 수정 2020-05-03 04:28

1985년. 여름방학을 맞아 한양대 의대생들이 우리 마을에 농촌활동(농활)을 왔다. 형과 누나들은 낮엔 농사일을 거들고 밤엔 제실에서 아이들을 교육했다. 중학교 1학년이던 그때 배운 노래가 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함부로 불렀다간 잡혀갈 수 있는 금지곡이었다. 서슬 푸른 전두환 신군부 시절이었다. 1980년에 벌어진 광주 학살 소식을 그해 처음 듣곤 분노가 아닌 두려움을 느꼈던 기억이 또렷하다.

1988년. 수학 수업시간이었다. ‘몸짱’ 3학년 형이 갑자기 교실로 들이닥쳤다. “교문 앞으로 다 모여!” 2, 3학년 형들과 연좌시위를 하면서 아직 영글지 않은 주먹을 허공을 향해 내지르며 을 불렀다. 이날 고교 선배였던 조성만 열사의 운구 행렬이 모교를 들러 망월동 묘지로 향했다. 투신자살한 그의 유서엔 “민족의 한인 광주 학살을 주도한” 군사정부의 퇴진 요구와 분노가 새겨져 있었다.

1993년. 농사를 짓다가 늦깎이로 대학에 입학했다.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노동야학 동아리방에서 기타를 배우던 친구와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 중 하나가 이었다. 노래의 연원을 희미하게나마 알게 된 건 그즈음이었다. 5·18 광주민주화항쟁 때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80년 5월 사망)씨와 그와 함께 노동야학에서 강학(교사)을 했던 박기순(78년 사망)씨의 얘기였다. 두 분의 넋을 기린 이 노래가 5·18을 상징한다는 걸 이때 알았다.

2004년. 한나라당 출입기자로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았다. 호남 민심을 얻고자 전남 구례에서 의원연찬회를 연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의원들을 데리고 광주 망월동까지 갔다. 어색하게나마 단체로 을 부르는 한나라당 의원들을 보는 건 ‘충격’이었다. 5·18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이후 제창되던 을 둘러싼 논란이 더는 없을 것이라 믿었다. 다만 그때 놓친 건 무리 맨 앞에 있던 박근혜 대표였다. 그가 노래를 따라 불렀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분명한 건 몇 달 앞서 열린 5·18 기념식에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던 노무현 대통령이 힘차게 부르는 것과 대비됐다.

2009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1년, 국가보훈처는 을 다 함께 부르는 제창이 아닌 합창단의 합창으로 바꿨다. 합창이냐 제창이냐 모호한 용어 문제로 희석되는 듯했으나 본질은 ‘금지’였다. 제창 금지는 2016년까지 이어졌다. 국론 분열, 북한 영화 배경음악 사용 등의 온갖 이유를 갖다댔으나, 5·18과 민주화를 바라보는 그들의 불편하면서도 반역사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박근혜씨는 대통령이 된 뒤 5·18기념식에 한 번 참석하긴 했으나 은 끝내 부르지 않았다. 대신 참석한 정홍원·황교안 총리 또한 입을 떼지 않았다.

2018년.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5·18 기념식에 참석해 힘차게 을 불렀다. 1년 전 정우택 원내대표는 침묵했다. 이제 다시 을 둘러싼 논란은 종지부를 찍은 듯 보인다.

하지만 아직 이르지 않을까. 보수단체는 여전히 트집을 잡는다. 제1야당의 홍준표 당대표는 행사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공식 기념곡 지정도 보류되고 있다. 굳게 입을 다물었던 황교안 전 총리는 보수 쪽 차기 대선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이들의 역사인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제창은 다시 금지되거나 논란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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