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에 ‘이사기요사’(潔さ)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자로는 ‘깨끗한 결’(潔)자를 쓰고 읽을 때는 ‘이사기요’라고 합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잡스러운 변명을 하지 않고 깔끔하게 사과하는 모습을 일본인들은 ‘이사기요이’라는 형용사로 묘사합니다. 굳이 한국어를 두고 일본어 표현을 들먹이는 이유는 일본인의 독특한 미감과도 연결되는 이사기요사라는 단어의 어감을 100% 살릴 만한 한국어를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 이따금 앵커들이 “요새 일본 정치가들의 모습에서 예전 같은 이사기요사를 찾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말을 합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1991년 8월 일본군의 성노예로 갖은 고초를 겪은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 자신의 피해를 증언한 뒤,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은 1993년 8월 담화에서 “당시 한반도는 일본의 통치 아래 있었고, 그 (일본군 ‘위안부’의) 모집·이송·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대체로 본인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다. (중략) 우리는 이 문제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 한번 표명한다”고 밝혔습니다. 아베 신조 총리는 1990년대 중반부터 일본군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갖은 변명을 가져다 붙이고 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고노 전 관방장관에게는 ‘이사기요사’가 있었던 것이고, 아베 총리에겐 이것이 결여돼 있는 것이죠.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혁명 같은 #미투 열풍 속에 은근히 가해자를 편드려는 얘기가 오갑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죄에는 경중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 가운데는 이윤택·조민기처럼 엄중한 형사처벌을 받아야 할 파렴치한도 있지만, 지금 같은 사회적 비난이 좀 과하게 느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다른 논리는 ‘여성들이 하는 말을 100% 신뢰할 수 없다. 무고 피해가 우려된다’는 주장입니다. 사실,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그렇기에 누군가 이런 얘기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면, 곳곳에서 치열한 격론이 이어집니다. 그 광경이 담담하고 성찰적인 ‘이사기요사’와는 거리가 멀기에, 개인적으로 기가 빨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번호는 다시 한번 ‘미투 운동’(#MeToo)을 다룹니다. 앞선 제1199호 표지이야기 ‘미투에서 위드유’에서 서지현 검사의 ‘역사적인’ 고발로 시작된 한국 미투 운동의 전반부를 다뤘다면, 이번호에선 활활 타올랐던 미투가 사그라진 뒤 벌어질 수 있는 ‘미투 그 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지금의 열풍이 지나면, 적잖은 여성이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에게 명예훼손 등으로 반격당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당한 성범죄 피해를 고소까지 했다면, 무고로 되치기당할 수도 있습니다.
진명선·박수진 기사가 땀 흘려 쓴 기사 속에서 ‘성폭력 무고’와 관련해 한국 사회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문장과 끔찍한 통계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첫째, “성폭력이 발생했음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다고 해서, 여성의 신고 자체가 허위라고 말할 순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성범죄 피해자 가운데 이를 신고하는 이들의 비율이 2016년 현재 1.9%에 불과했다는 여성가족부 통계입니다. 무고는 내 고소가 허위임을 알면서도 상대방을 욕보이려고 저지르는 범죄입니다. 성폭력 무고와 관련해선 사법 당국이 지금보다 더 신중한 판단을 해주길 기대합니다.
98.1%가 눈물로 고통을 견디는 사회는 행복한 사회일 수 없습니다. 이런 사회를 바꾸려면, 1.9%의 용기 있는 피해자들의 결단을 장려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리는 결론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투, 위드유!(나도 그래요. 우리는 당신과 함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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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