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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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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등록 2017-07-11 16:43 수정 2020-05-03 04:28

저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사이엔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뭐냐고요? 생존을 걱정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어떻게 하면 시사주간지가 살아남을지 걱정합니다. 변화를 향한 도전은 늘 힘이 들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2011년 12월 부친의 뒤를 이어 북의 최고지도자가 된 김정은 위원장의 고민도 ‘생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남북이 분단돼 있지 않았다면 북한도 1990년대 초 냉전 해체의 물결 속에서 다른 동유럽 국가들처럼 개혁·개방의 길을 갔을 거라고 봅니다. 남에게 흡수되지 않을까 우려했던 북의 고립은 심화됐고, 경제 상황은 악화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택한 길은 ‘핵개발’이었습니다. 1993~94년 1차 핵위기는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를 통해 봉합됩니다. 이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6·15 공동선언이 있었고,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평양선언이 나왔습니다. 동아시아의 해빙 분위기는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 탓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이즈미의 방북 직후인 2002년 10월3일 북한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는 평양에서 만난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HEU(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보유 사실을 시인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켈리의 방북으로 ‘제네바 합의’에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그와 함께 김 대통령의 6·15 공동선언과 고이즈미의 평양선언이 휴지 조각이 됩니다.

그렇지만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됩니다. 6자회담이란 대화의 틀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2005년 9·19 공동선언)라는 커다란 비전이 공유되고, 북한 핵시설의 폐쇄·봉인에 대한 2·13 합의, 불능화를 규정한 10·3 합의가 이뤄집니다. 하지만 진전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 북핵 전문가는 2008년 8월께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에 큰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을 그 원인으로 꼽습니다. “당시 6자회담 결렬의 표면적 원인은 (북한 핵시설에서) 시료를 채취하는 문제였다. 힘겨운 뇌수술 끝에 다시 건강을 회복한 김 위원장은 아들에게 반드시 핵을 쥐어주고 가야 한다고 결심한 게 아닌가 싶다.” 김정일 위원장은 2009년 5월 2차 핵실험을 감행했고, 그의 사후에 열린 2013년 3월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핵개발과 경제성장을 함께 추진하겠다는 ‘병진노선’이 북한의 국가전략으로 제시됩니다.

북한은 어떤 조건에서 핵을 포기할까요?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나눈 10·4 정상회담 회의록에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장의 흥미 있는 발언이 담겼습니다. “(2·13 합의에 따라) 우리가 핵계획, 핵물질, 핵시설 다 신고합니다. 그러나 핵물질 신고에서는 무기화된 정형은 신고 안 합니다. 왜? 미국하고 우리하고는 교전 상황에 있기 때문에 적대 상황에 있는 미국에 무기 상황을 신고하는 것이 어디 있갔는가. (하략)”

북핵은 해결하기 힘든 문제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7월6일(현지시각) 베를린 연설에서 “어떠한 형태의 흡수통일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상대의 말’이 아닌 ‘나의 실력’입니다. 대화를 위한 여러 전제조건을 북에 제시한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은 여전히 위협적으로 들립니다. 북은 최종적으로 생존을 보장받을 때까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한 방’을 원하는 듯합니다.

나의 한쪽 팔을 내놓을 수 있는 좀더 대담하고 파격적인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북이 문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불행하지만 그렇진 않을 겁니다.

길윤형 편집장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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