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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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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숭고함

등록 2017-05-03 13:45 수정 2020-05-03 04:28

대학 시절 탐닉하던 문장들이 있었습니다.

로마가 만들어낸 유일한 ‘창조적 천재’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뛰어난 정치가이자 전략가였지만, 품격 있는 문장을 써낸 당대의 문장가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쓴 와 는 피로 물든 기원전 1세기를 살아낸 품격 있는 로마인의 지성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저서입니다. 이 책들의 뛰어난 점을 꼽으라면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카이사르라는 인간의 ‘자기객관화’ 능력일 것입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로마의 운명을 걸고 건곤일척의 내전을 벌이던 중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합니다. 원인은 카이사르가 아끼던 젊은 지휘관 쿠리우의 판단 착오였습니다. 그는 카이사르가 시칠리아 제패를 위해 내준 4개 로마군단을 이끌고 1차 목표인 섬 장악에 성공합니다. 이어 2차 목표인 북아프리카 제패를 위해 자신이 보유한 4개 사단 가운데 2개 사단만 데리고 지중해를 건넜습니다. 그리고 머잖아 벌어진 전투에서 처절하게 패배합니다.

적에게 포위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허겁지겁 달려온 기병대장이 쿠리우에게 말합니다. “지금이면 기병만이라도 도망칠 수 있습니다.” 젊은 쿠리우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카이사르가 맡긴 군단을 잃고 카이사르에게 돌아갈 순 없소.” 방패를 버리고 적진으로 뛰어든 쿠리우와 함께 2만 명의 로마 중무장 보병이 몰살당했습니다.

이 패배에 대한 의 기술은 냉정하기 그지없지만, 자신이 사랑했던 부하에 대한 연민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오히려 카이사르답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문장입니다.

“그(쿠리우)의 젊음, 그의 용기, 그때까지 거둔 승리, 그리고 임무를 더욱 충실히 수행하려는 책임감, 카이사르의 군대를 맡았다는 강한 자부심이 그로 하여금 성급한 판단을 내리게 했다.”

지난 4월23일 한국방송 TV토론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동성애 관련 발언으로 한국 사회 전체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문재인 후보는 ‘동성애에 반대하는 것이냐’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의 질문에 “네,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동성애의) 합법화에 찬성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본인 스스로가 성소수자인 제 지인은 이 발언을 두고 “집권을 위한 저강도의 살인”이라는 평을 남겼습니다.

그의 노회함, 그의 경험, 지난 대선에서 겪은 뼈아픈 패배, 그리고 이번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책임감,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강한 부채의식에 ‘한 표라도 흘리면 안 된다’는 정치공학적 고려가 더해져 그런 답변이 나온 것일까요. 숨이 막혀버린 우리는 그냥 이리저리 생각만 해볼 뿐입니다.

이번호 표지이야기에선 문재인과 안철수를 다룹니다. 이번 대선에선 두 유력 후보 가운데 한 명이 당선될 것입니다. 지난주 제1159호 표지이야기에서도 언급했지만, 불행히도 이 둘은 모두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지난겨울을 환하게 밝혔던 촛불의 이상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요. 더러운 현실 속에서, 다소의 손해를 감수하고 더 나은 가치를 집요하게 추구해가는 ‘정치의 숭고함’은 한국 사회에선 불가능한 것입니까.

누구라도 붙잡고 울고 싶어지는 저녁입니다.

길윤형 편집장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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