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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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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아니면 1

등록 2017-02-14 15:27 수정 2020-05-03 04:28

옛날 옛적, 대입 수험생들 사이에 정평이 난 수학시험 전략이 있었다. ‘0 아니면 1’.

주관식 문제, 특히 미적분 문제의 답은 0 아니면 1이다. 대신 하나만 택해야 한다. 번갈아 적으면 기가 막히게 정답만 피해가는 일이 생긴다. 그러니 하나만 적어라. 0 아니면 1.

나도 이 노하우를 적용해 대입시험에서 한 문제를 건졌다. 물론 미적분 문제였다. 이 전략에 담긴 철학은 두 가지다. 첫째,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일수록 답은 간단하고 명쾌하다. 둘째, 머리가 나쁘면 여러 생각 말고 하나만 밀어야 한다.

새누리당의 새 당명으로 자유한국당이 유력하다고 한다.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이름 바꾼 지 딱 5년 만이다. 누군가 작심하고 한심한 이름으로 바꿔 망신을 자초하는 장기 계획을 입안한 것 같다.

한국 보수를 대표하는 정당의 이름을 일별하자면, 이승만의 자유당,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전두환의 민주정의당, 노태우·김영삼의 민주자유당, 이회창의 신한국당과 한나라당, 박근혜의 새누리당 등이 있다. 한국의 보수는 자유와 공화를 주기적으로 (그리고 내키는 대로) 번갈아 써먹었다. 기가 막히게 정답을 피해가는 최악의 방식이다. 게다가 스스로 오염시킨 개념을 재활용했다. 똥 묻은 옷을 입고는 ‘나, 예쁘냐’고 묻는 격이다.

예컨대 이승만의 자유당 이래 한국 보수의 자유는 반공이었고, 그 기치를 걸어 반대파를 죽이거나 감옥에 가뒀다. 반공의 자유에서 희열을 느끼는 이는 이제 60~70대의 ‘아스팔트 우익’밖에 없다. 자유만큼이나 아무 잘못 없는 공화의 개념도 한국에선 기득권 수호로 변질됐다. 모두를 통합하겠다는 공화의 정신을 ‘(한)나라’ ‘(신)한국’ 등 국가를 호명하는 것으로 대체하면서, 소수 기득권 계급의 독식을 옹호했다. 신한국, 한나라, 새누리의 이름이 젊은 세대로부터 줄곧 놀림감이 된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름으로 음습한 짓만 벌여온 것이다.

보수정당이 어떻게 혁신하면 좋을지는 미국에 물어보면 된다. 노예제를 폐지하고 분열된 나라를 하나로 묶은 링컨 대통령을 배출한 이래 미국 공화당은 변함없이 공화당이다. 즉, 당명은 그대로 둔다. 대신 정당을 대표하는 이념을 계속 갈고닦았다. 간략히 짚자면, 자유주의 체제를 공격적으로 확산시키겠다는 1980년대의 사상운동(네오콘), 시장 자유를 일관되게 추진하겠다는 1990년대의 정책운동(깅리치 혁명), 시민의 역량을 바탕으로 정치활동을 벌이겠다는 2000년대의 풀뿌리운동(티파티) 등이 그것이다. 일련의 과정에서 혐오주의가 덧붙여져 트럼프라는 괴물로 귀결되긴 했지만, 무릇 정치의 혁신은 사상·정책·시민의 연결고리를 잇는 장기 진화의 과정인 것이다.

자유한국당의 이름은 새롭지 않다. 이제 와 돌이킬 수는 없을 테니, 우선 옷에 묻은 똥부터 털어내는 게 좋겠다. 자유를 내세우려면 표현의 자유와 시장활동의 자유부터 보장하고, 공화를 강조하려면 분열을 책동하지 않는 게 좋겠다. 블랙리스트 관련자는 당연히 털어내고, 관치경제의 과거와 작별한 뒤, 각종 정보·권력 기관을 손보는 대선 공약이라도 발표하면 좋을 것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일수록 답은 간단하고 명쾌하다. 2017년 한국 보수정당의 혁신을 묻는 주관식 문제의 답은 공화 아니면 자유다. 그동안 공부를 게을리했으니, 하나만 택하여 궁리를 밀어붙여보자. 둘 가운데 무엇이 좋겠는가. 자유인가 공화인가.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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