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협량이긴 해도, 돈 문제만큼은 너그럽다(경제 관념이 희박하다는 뜻이다). 일 많다고 아우성인 기자들에게 수시로 밥과 술을 바친다. 네댓 명 모이면 10만~20만원은 우습다. 그래도 기꺼이 낸다. 글쓰기 강연 한 번이면 감당되는 돈 아닌가 말이다(술값 지급 횟수와 강의 횟수에 상당한 불일치가 있긴 하다). 리더의 1천 가지 덕목 가운데 하나는 갖췄다 자부하는데, 기자들이 인정해줄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좀스럽게 돈 계산을 하고 앉은 한심한 순간이 있다. 월급명세서 받는 날이다. 습관처럼 덧셈과 뺄셈을 하게 된다. 호봉 높은 걸 보니 신문사 오래 다녔구나. 그래도 기본급은 이 모양이구나. 휴일근로수당이나 정기독자 확장수당 깎이면 술값 내기 어렵겠구나….
‘지급 내역’의 실망은 ‘공제 내역’의 불만으로 이어진다. 특히 하나의 숫자에 눈길이 박힌다. 국민연금이다. 소득세·주민세·건강보험 등은 어떻든 조만간 복지 혜택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국민연금만큼은 아직 오지 않은, 안 왔으면 좋겠는 ‘노년에 구현될 이익’에 대한 약속이다. 일찍 죽을 수도 있겠고(설마…), 늘그막에 큰돈을 벌 수도 있는데(말도 안 돼…), 술자리 두어 번 치를 저 돈을 왜 매달 국가에 맡겨두는가. 제대로 돌려받긴 하는 건가.
그런 의문이 주렁주렁 달린 돈을 빼내 제 배만 불린 사람을 뭐라 부르면 좋을까. ‘사기꾼’ 말고 달리 부를 말이 있을까. 박근혜씨는 친구 최순실씨를 위해 삼성에서 420억원을 받았다. 그 대가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성공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일가는 최소 7445억원에서 최대 3조7187억원의 이득을 취했다. 그 과정에 동원된 국민연금공단은 최소 1233억에서 최대 6157억원의 손실을 입었다. 최근 통계에 따라, 국민연금 가입자 평균수령액을 연간 384만원으로 보면, 약 16만 명이 1년 동안 받을 국민연금액에 해당한다. 박근혜씨, 최순실씨, 이재용 부회장이 돈 버는 동안 국민만 손해 봤다. 그 가운데 나도 포함돼 있다.
그러니 내 돈 내놔라. 돈 떼먹고 호의호식한 사기꾼이 치르는 징벌 그대로, 일단 감옥부터 가고, 빼앗아간 그 돈은 토해내라. 다시 국민연금 곳간에 채워넣어라. 그래야 매달 ‘공제 내역’에 수긍이 가겠다. 그래야 시장주의적 정의나마 아직 살아 있다고 믿을 수 있겠다.
… 이쯤에서 글을 맺는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정의 구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시 월급명세서로 돌아가면, ‘지급 내역’에 적힌 숫자는 신문사 수익에 기초했고, 그 상당액은 대기업 광고에서 비롯했으며, 그중엔 삼성 광고의 비중이 높다. 즉 박근혜씨의 이익을 챙겨주면서 이재용 부회장이 막대한 이득을 얻은 덕분에 신문사는 삼성 광고를 더 많이 실었겠고, 기자들은 월급을 받았다. 그러니 나는 ‘국민의 이름으로’ 손해를 보았지만 ‘기자의 이름으로’ 이득을 본 셈이다. 저 뇌물 범죄의 고리 어딘가에 나도 껴 있다. 찜찜해 죽겠다.
그 점을 성찰하면서 요구사항을 조정하자면, 기자들 손해는 제하고, 다른 선량한 시민들의 돈이라도 내놔라. 공범의 고리에서 조만간 완전히 벗어나면, 삼성 광고 받지 않는 대신 독자 수천 명을 늘리게 되면, 술값을 삼성 말고 독자한테 받게 되면, 그 기막히게 맛있을 술을 기자들과 함께 마시는 날이 오면, 따박따박 말하겠다. 이제 내 돈 내놔라.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탄핵으로 나갔다 탄핵 앞에 다시 선 최상목…“국정 안정 최선”
물에 빠진 늙은 개를 건져주자 벌어진 일 [아침햇발]
윤석열 “2번, 3번 계엄령 선포하면 되니까 끌어내”…국회 장악 지시
“교수님, 추해지지 마십시오”…‘12·3 내란 옹호’ 선언에 답한 학생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탄핵안 가결…헌정사상 처음
“백령도 통째 날아갈 뻔…권력 지키려 목숨을 수단처럼 쓰다니”
“이재명·우원식·한동훈부터 체포하라” 계엄의 밤 방첩사 단톡방
조갑제 “윤석열 탄핵 사유, 박근혜의 만배…세상이 만만한가”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키운 한덕수, 대체 왜 그랬나
[전문] ‘직무정지’ 한덕수, 끝까지 ‘야당 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