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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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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의 온도

제8회 손바닥문학상 가작
등록 2017-01-05 15:08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이곳은 병원이군요. 가습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가 어렴풋하게 보여요. 병실 안이 환한데도 조금 춥네요. 지금이 무슨 계절이죠? 조금 더 두꺼운 이불을 가져다주세요. 엄마, 내 목소리가 들려요? 추워요. 아주 밝은 빛이 엄마의 윤곽을 마구 뭉개고 있어요. 마치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아요. 온 세상이 고요하고 잠잠해요. 보이는 모든 것들이 쉬지 않고 일렁거려요. 무엇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거죠?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내가 얼마 만에 깨어난 거예요? 엄마, 제발 울지 말아요. 이제 괜찮아요.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예요.

시베리아의 이상 저온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네요. 볼륨을 좀 높여주세요. 맞아요. 저곳이 내가 있었던 곳이에요. 한극, 추위의 끝이라 불리는 곳. 다섯 달치 눈이 한 달 새 내렸다는군요. 북극의 이상 고온으로 따뜻해진 수증기가 이례적인 폭설로 쏟아졌다고요. 예전 같았으면 저 역시 그렇게 분석했을 거예요. 따뜻해진 북극의 영향으로 추운 시베리아가 더욱 차가워진 거라고. 그런데요, 엄마. 북극이 왜 따뜻해졌을까요.

미희를 만난 건 이른 봄이었어요. 삼월 중순쯤 됐을까요. 계절상으로는 봄이지만 일 년 중 8개월 가까이 눈이 내리는 야쿠츠크에는 오월에도 눈이 내려요.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여 있죠. 이미 봄인데도 영원히 봄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날들이 이어져요. 그날도 전날 내린 눈이 야쿠츠크를 뒤덮고 있었어요. 이 년을 질질 끌다 완성한 논문을 제출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너무 피곤한데도 논문을 끝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워서 곧장 집으로 들어가기가 싫었어요.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죠. 영화관에서 러시아어로 더빙된 영화 한 편을 보고 마트에 들렀어요. 한참을 구경한 후에 고기며 과일, 온갖 군것질거리와 케이크까지 사고 나오자 밖이 어두워져 있었어요. 찬바람까지 불기 시작해서 서둘러 집으로 향했어요.

집 근처에 이르러 두껍게 언 눈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언덕을 올라가고 있을 때였어요. 아파트 입구 옆에 검은 형체가 언뜻 보였어요. 내가 살던 곳은 개발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동네라 치안이 별로 좋지 않았어요. 해가 지면 걸어다니는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요. 잔뜩 긴장한 채로 열쇠를 손에 꼭 쥐고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는데 뒤에서 ‘막내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석이 아저씨였어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긴장이 탁 풀려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아이, 아저씨. 놀랐잖아요.’ 하자 아저씨는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어요. 그러곤 따라오라고 하더군요. 집에다 짐을 넣어두곤 아저씨를 따라나섰어요. 오랫동안 아저씨를 보지 못했던 터라 반가우면서도 오랜만에 보는 아저씨가 낯설었어요.

아저씨는 아파트 뒤로 죽 이어진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갔어요. 낮에는 가끔 산책이나 할 겸 해서 숲길로 다닌 적이 있었지만 한밤중에 숲으로 들어간 건 처음이었어요. 달빛에 반사된 흰 눈길이 끝도 없이 꼬불꼬불하게 이어져 있었어요. 자주 왔었던 곳인지 아저씨는 거침없이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나중엔 거의 뛰다시피 걷는 바람에 쫓아가기가 힘들었어요. 숲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빽빽한 나무 때문에 길이 잘 보이지 않았어요. 몇 번을 미끄러지면서 걷다 보니 덜컥 겁이 났어요. 몇 달 동안 보지 못했던 아저씨, 인적이 없는 깊은 숲. 혹시 또 북쪽에서 무슨 얘기가 내려왔나? 이제는 어쩔 수 없어서 나를 해치려 하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걸음을 멈췄는데, 아저씨가 멀리서 뭔가를 안고 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어요.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하다가 멈췄어요. 그리고 잠깐이나마 아저씨를 의심했던 것에 대해 깊은 죄책감을 느꼈어요. 아저씨가 울고 있었거든요.

처음엔 죽은 짐승인 줄 알았어요. 고라니 같은 것이 어두운 색 담요에 쌓여 있는 줄 알았다고요. 다가가서 보니 아저씨 품 안에 안긴 것은 사람이었어요, 엄마. 사람이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야윈 어린아이였어요. 몇 시간을 그 숲속에 있었던 건지, 아니 몇 날 며칠을 있었던 건지, 새파랗게 얼어 있었어요. 그제야 아저씨도 얇은 티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나는 얼른 목도리를 벗어 아저씨의 목에 두르고 병원에 가자고 말했어요. 고집부릴 때가 아니라고 말을 해도 아저씨는 ‘집으로 좀 가자우.’ 할 뿐이었어요.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지금 돌이켜봐도 생각이 잘 나질 않아요. 전기장판을 틀어놓고 뜨거운 물을 욕조에 받았어요. 갑자기 온도 차이가 나면 뇌혈관이 터질 수도 있어 마냥 뜨겁게만 할 수도 없었어요.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아이를 닦고 얇은 옷을 여러 겹 입혔어요. 니트 모자를 씌우고 양말까지 신기고 나서 좀 기다리자 창백했던 아이의 볼에 아주 조금씩 혈색이 돌았어요. 어찌나 안도감이 들었는지요. 뭘 좀 먹여야 할 것 같아 냄비에 쌀죽을 끓였어요. 아저씨는 부엌 식탁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목도리 끝만 만지작거리고 있더라고요.

죽을 좀 드시라고 해도 드시지도 않고, 차를 끓여 드려도 가만히 보고만 계셨어요. ‘저 애가 미희예요?’ 하자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아저씨가 보낸 돈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요. 딸 하나 잘 먹여보겠다고 여기까지 온 건데. 열 살이라는 미희는 여덟 살도 채 안 되어 보였어요.

아저씨가 목도리를 벗어서 잘 개어놓은 후에 입을 열었어요.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아저씨의 목소리가 너무 작고 약해서 나는 무서웠어요. 예감이 좋지 않았어요. 나는 얼른 ‘아저씨, 걱정 마세요. 내가 여기서 미희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다 할 테니까.’ 하고 아저씨 입을 막았어요. 아저씨는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다시 말했어요.

“난민증….”

그러고는 나를 쳐다보고 말을 이었어요.

“도와달라.”

아저씨가 가고 나서 한참을 부엌에 앉아 있다가 미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어요. 미희는 뒤척이지도 않고 깊이 잠들어 있었어요. 이불을 걷고 몸이 좀 따뜻해졌는지 보려고 양말을 벗겼어요. 여러 번 동상에 걸렸는지 발가락이 모두 검게 변해 있었어요. 소용없겠지만, 그래도 연고를 좀 바른 채로 다시 양말을 신기고 이불을 덮어줬어요. 이 작은 아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여기까지 오느라 몇 개의 국경을 넘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니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게 허무하다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지역별로 눈의 결정을 관찰하고, 쌓인 눈의 깊이를 측량하고, 매일 내리는 눈의 양을 기록하고…. 엄마, 그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내가 부지런히 기후를 관측하고, 관찰하고 기록할수록 사람들은 두려워하겠죠. 겨울이 점점 더 혹독하게 추워지고 있고 지상에서 봄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하니까요. 지난 4년간 매달렸던 논문 때문에 책상 옆에는 하얀 에이포용지가 눈처럼 쌓여 있었어요. 엄마, 나는 지금까지 무얼 하며 살았던 거죠?

엄마. 이 년 전 겨울을 기억해요? 맞아요. 석사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잠시 들렀잖아요. 오랜만에 집에 왔다고 엄마가 잡채며 갈비찜이며 맛있는 것도 많이 해줬었잖아요. 그때 얘기했던 철이 아저씨, 기억나요? 내가 한국에 돌아간다고 내 손에 오천 루블짜리 지폐를 쥐여줬던 그 아저씨요. 학교 앞에서 집에 가는 버스를 타려는데 누가 갑자기 제 앞에 끼어들더니 손에다가 종이 같은 걸 쥐여주는 거예요. 검은 야구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어서 누군지 몰라봤는데 내 귀에다 그러데요. ‘조심히 잘 가라. 내 이름 김춘일. 잊지 말라.’

오천 루블이면 아저씨들이 한 달 동안 쓸 수 있는 생활비였어요. 김 춘 일. 그날 처음으로 철이 아저씨의 진짜 이름을 알았어요. 그리고 밖에서 아저씨를 만난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죠. 감시 때문에 아저씨들이 우리 아파트에서 공사가 있는 날에만 조심스럽게 집 안에서 만나곤 했었거든요. 그 좁은 집에서 새해가 되면 떡국을 끓여 먹고 여름이 되면 냉면을 말아 먹곤 했었어요. 날이 새도록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기도 하고, 같이 카드게임도 하고요. 철이 아저씨는 난민증을 발급받아서 곧 한국으로 떠날 예정이었어요. ‘기회가 되면 꼭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 하고 헤어졌는데….

그날 아저씨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내가 한국에서 호사를 누리며 쇼핑도 하고 매일같이 배가 터지도록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야쿠츠크에서의 일들은 새까맣게 잊어갈 때, 야쿠츠크의 사람들은 가장 추운 겨울을 나고 있었어요. 한국에서의 짧은 시간을 보내고 야쿠츠크의 집에 도착했던 날이었어요. 식탁 위에 황토색 봉투 하나가 반듯하게 놓여 있더라고요. 너무 놀랐어요. 집 열쇠는 나만 가지고 있었거든요. 집주인이 왔다 갔나 하고는 봉투를 열었다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어요. 엄마. 철이 아저씨는 국경을 넘지 못했나 봐요.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진. 봉투 속에는 눈 속에 거꾸로 처박힌 철이 아저씨와 아저씨 옆으로 번져 나온 새까만 피, 그리고 아저씨가 쓰고 있던 야구모자가 찍힌 사진이 들어 있었어요. 아저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그리고 누가 우리 집에 그 봉투를 두고 갔던 걸까요.


그 후로 아저씨들과 전혀 연락을 하지 않았어요. 시내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내 쪽에서 먼저 피하고 모른 척했죠. 두려웠어요. 아저씨들과 보낸 따뜻했던 모든 시간을 후회하기 시작했어요. 왜 위험하게 아저씨들과 가까이 지냈을까. 주변에서 조심하라고 말릴 때 왜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까. 내가 어려울 때마다 기꺼이 나서서 도와주었던 아저씨들을 미워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아저씨들과 같은 처지에 놓일까 봐 벌벌 떨었어요. 내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자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환경, 안전에 대한 안정감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어요. 박사를 다른 곳에서 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죠.

‘시베리아의 이상 저온 현상에 관한 연구’. 그동안 작업해놓은 논문과 논문계획서를 가지고 다른 지역 대학의 교수들에게 연락을 돌렸어요. 생각지도 못했는데 여러 곳에서 연락이 왔어요. 당시 이상 기후 현상이 급속도로 심각해져서 러시아 전역에서 연구팀을 꾸리고 있었어요. 야쿠츠크에 있으면서 직접 관측하고 연구한 이력 때문에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조건으로 연구팀에 합류시켜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때 엄마와 통화했던 내용도 기억이 나요. ‘우리 딸 출세했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보람이 있네.’ 평소에는 무뚝뚝하던 아빠도 그날은 ‘수고했다.’고 나를 격려했었죠.

박사과정은 정규학기인 9월부터 시작하기로 했어요. 나는 3월부터 8월까지 남는 시간에 연구 과제를 좀 미뤄두고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 전역을 도는 여행을 계획했어요. 하루라도 빨리 야쿠츠크에서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떠나기 전날 밤, 잠이 오지 않아 거실에서 하릴없이 TV를 보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소름이 끼쳤어요. 이 시간에 누굴까. 가만히 문가로 가서 귀를 기울였어요. 그때 ‘막내야.’ 하고 부르는 석이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i>엄마, 사실 그날, 나는 봤어요. 철이 아저씨를 따라가던 두 사람을요. 그날 학교에 가는 길에 우리 집 아파트 앞에서 봤던 사람들이었어요.</i>

문을 열자 아저씨가 술에 취한 채 손에는 검은 봉지를 들고 서 있더군요. 아저씨는 현관에 서서 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고 마른세수만 몇 번을 하더니 봉지를 내려놓고 뒤돌아섰어요. 석이 아저씨의 뒷모습과 철이 아저씨의 뒷모습이 겹쳐졌어요. 항상 붙어다니던 두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가면 영영 보지 못할 것만 같았는데도 아저씨를 잡지 못했어요. 봉지 안에는 아저씨들이 월급날이면 사다 주곤 했던 오렌지 두 개와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었어요. 석이 아저씨까지 위험해질까 봐 나가서 배웅조차 하지 못하고 문을 잠갔어요. 그때서야 내게 아저씨들이 어떻게 했었는지 다시 생각이 났어요. 내가 논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 ‘막내야, 그래도 네가 열심히 해야 우리가 더 신이 나서 일을 하디.’ 하던 일들, 때때마다 가족처럼 챙겨주던 일들이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엄마, 사실 그날, 나는 봤어요. 철이 아저씨를 따라가던 두 사람을요. 그날 학교에 가는 길에 우리 집 아파트 앞에서 봤던 사람들이었어요. 한 사람은 갈색 가죽점퍼에 러시아 털모자를, 한 사람은 두툼한 패딩점퍼에 검은색 니트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공사하러 오는 아저씨들 중에 새로 온 분들인가 보다 하고 지나쳤는데, 그날따라 학교에서도, 버스정류장에서도 그 사람들과 마주쳤어요. 내가 버스에 올라 철이 아저씨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자리에 앉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버스가 출발하고 나서 동전으로 창문에 얼어붙은 성에를 긁어내고 밖을 내다봤어요. 철이 아저씨의 뒤를 그 두 사람이 밟고 있었어요.

엄마. 그날 내가 학교에 가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철이 아저씨가 오천 루블을 가지고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내가 ‘설마, 아닐 거야….’ 하고 넘기지만 않았더라면, 빠르게 대처를 했었더라면, 철이 아저씨에게 위험하다고 알렸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요? 애초에 아저씨가 난민증을 받는 걸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날의 나는 왜 더 조심하지 않았을까요.

아니, 우리는 왜, 만나서는 안 되는 걸까요.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석이 아저씨가 아이스크림을 주고 간 날 내게 한 말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어요.

“막내야.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디….”

엄마, 그럼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왜 일어났던 걸까요.

석이 아저씨가 다녀갔던 밤, 나는 다른 도시로 가려는 계획을 모두 취소했어요. 야쿠츠크에 남아, 아저씨들 곁에 남아 처음에 계획했던 연구를 마치기로 했어요. 내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어디로도 가지 않을 자유도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더는 도망치지 않고 아저씨들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조금이나마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부하겠다고 했던 약속이오.

엄마.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미희는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어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좀 답답해했지만 집에서 그림도 그리고 공부도 하면서 의젓하게 잘 지냈어요. 석이 아저씨는 이른 새벽에 종종 찾아왔어요. 두부며 떡이며 야쿠츠크에서는 구하기 힘든 음식들을 어디서 그렇게 구해오는 건지. 미희는 아저씨가 두고 간 음식들을 먹으면서 내게 국경을 넘어 야쿠츠크까지 오게 된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어요.

그사이 아저씨의 부탁대로 나는 미희와 아저씨의 난민증을 신청했어요. 야쿠츠크의 경계를 벗어날 수 없는 아저씨 대신 내가 다른 도시로 넘어가서 변호사를 만나고 왔어요. 하루, 이틀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난민증 발급은 계속해서 미뤄졌어요.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내 박사 논문 심사가 통과됐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학기가 끝나는 유월쯤이면 논문 발표까지 끝이 날 예정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유월 말쯤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죠. 아저씨와 미희에게 그 사실을 차마 얘기하지 못하고 몰래 조금씩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어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야쿠츠크의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흘렀어요. 온갖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넘쳐나고 쇼핑할 곳도 많은 한국에 비해 야쿠츠크의 생활은 너무 단조로웠어요. 눈이 있는 동안에는 밖에 나가 30분 이상 걷기도 어려울 만큼 춥고, 고요했어요.

매일같이 빨리 한국에 가고 싶단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한국에서 큰 사건이 터졌어요. 많은 학생이 목숨을 잃고 많은 사람이 가족을 잃었어요.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가 TV와 인터넷으로 전세계에 보도됐어요. 아저씨와 미희는 나를 안아주며 위로해줬어요.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북한에서도 아파트가 무너지는 일이 일어났어요. 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어요. 너무 많은 사람이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무턱대고 이별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 앞에서 나는 미희의 손을 꼭 잡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뉴스가 끝나고 미희가 내게 물었어요. 슬픔을 참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요.

엄마. 엄마는 슬픔을 견뎌내는 법을 알고 있나요? 그렇다면 내게도 좀 알려주세요. 그날 나는 미희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 아이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미안해, 미희야. 이모가 미안해.’ 하면서요.

미희 안에는 얼마만큼의 슬픔이 있었던 걸까요.

엄마. 나는 확신하게 됐어요. 슬픔에도 무게가 있다는 걸요. 얼마나 무거운 슬픔이 그 아이 안에 있었기에 그 작은 아이가 날아가버리지 않고 이 땅을 걸을 수 있었던 걸까요. 어떻게 열 살짜리 아이가 국경을 넘고 도시의 경계를 넘어 추위의 끝, 한극에 다다랐을까요.

겨울 같았던 봄이 지나고 유월이 됐어요. 아저씨가 난민증이 나왔다고 내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마침, 내 논문도 학술지에 발표가 됐어요. 아저씨와 미희에게 그제야 나도 한국에 돌아간다고 이야길 했어요. 아저씨는 떠나기 전에 꼭 파티를 하자고 했어요. 아저씨의 입에서 나온 ‘파티’라는 말이 퍽 우스워 나는 웃었어요. 케이크는 내가 준비하겠다고 했었죠.

아저씨와 미희가 다른 도시로 떠나기로 한 날 진짜로 나는 케이크를 샀어요. 생일 때만 불던 초를 불자 미희가 신기했는지 왜 초를 부느냐고 물었어요. 나는 미희에게 이제 미희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게 됐다고 얘기했어요. 어디로 가고 싶으냐고, 아는 나라가 있냐고 묻자 미희는 야쿠츠크가 제일 좋다고 대답했어요. 춥기만 하고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데 여기가 뭐가 좋으냐고 묻자 이렇게 말하더군요.

“여기에는 아빠가 있잖슴까.”

그 말에 우리는 같이 웃었어요. 우리에게 좋은 날들이 올 것 같았어요. 죽음이 늘 내 뒤에 있는 것 같은 두려움도, 누군가로부터 감시받고 있는 것 같은 섬뜩함도, 답답한 아파트에서 숨어 있어야만 하는 생활도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날은 따뜻하다 못해 더워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두꺼운 겉옷을 모두 벗어버렸어요.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죠. 아주 잠깐이었지만 우리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어요. 마음 놓고 웃고 떠들었던 잠깐의 시간이요.


<i>엄마. 이것이 내가 아는 이야기의 전부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후로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면요.</i>

저녁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다른 도시로 가는 걸 도와주기로 한 사람이 집으로 왔어요.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군요. 미희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매일 걸고 다녔던 목걸이를 미희에게 걸어줬어요. 엄마가 내게 주었던 그 목걸이 말이에요. 나를 지켜줄 거라던 호루라기 목걸이. 미희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로 ‘고맙슴다.’ 하고는 웃었어요. 아저씨 손을 꼭 잡고는 눈물을 참으며 끝까지 웃어줬어요. 아저씨는 내게 ‘잘 있으라우.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만나자.’ 하고 악수를 청했어요. 아저씨의 거친 손이 따뜻했어요. 울지 않으려 했는데 자꾸 눈물이 나더군요. 지금 헤어지면 우리가 언제 또 만날까, 하는 생각에 자꾸만 눈물이 났어요. 그리고 세 사람은 차를 타고 떠났어요.

엄마. 이것이 내가 아는 이야기의 전부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후로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면요. 미희와 아저씨는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고, 나 역시 그저 그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런 축복이 주어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한국에서의 교수 임용이 자꾸만 미뤄졌어요. 실력으로, 경력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점수들이 있었어요. 열심히 살아도 되지 않는 일들이 있더라고요. 칠월이 되고, 팔월이 되고 여름이 끝나가는데도 나를 부르는 곳이 없었어요. 결국, 나는 또 야쿠츠크를 떠나지 못하고 야쿠츠크 대학의 박사후 연구원으로 취직했어요.

엄마 아빠는 왜 계속 그 추운 곳에 있으려 하냐고 야단이었죠. 엄마 아빠를 실망하게 하는 것 같아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했어요. 직접 갈 필요가 없었는데도 탐사대와 함께 노릴스크, 무르만스크와 같은 북극권의 도시들을 돌며 기후를 관측했어요.

북극의 기온은 점점 더 올라가고 있었어요. 재작년보다는 작년이, 작년보다는 올해 기온이 더 높았어요. 겨울이 다가오는데도 북극은 여전히 따뜻했어요. 내가 논문에서 주장한 것과 같이 탐사대도 북극이 따뜻해지는 이유를 ‘지구온난화’로 꼽았어요. 그렇게 결론을 내려놓고 어떻게 기후가 변하고 있는지를 기록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었죠.

한 달 정도 북극권의 도시에 있다가 야쿠츠크로 돌아온 날이었어요. 시월 초였는데 야쿠츠크에는 폭설이 내렸어요. 이상할 만큼 따뜻한 북극, 무서울 만큼 추운 시베리아. 순간 섬뜩했어요. 정말 단순히 지구온난화 때문에 북극이 따뜻해지고 있는 걸까. 오랜 시간 매달려 연구를 하면서도 처음의 가정이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었어요. 만약, 지구온난화가 아니라면요. 그렇다면 이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북극권의 도시들을 다니면서 시력이 더 나빠졌어요. 야쿠츠크에 살면서도 눈에 반사된 빛이 강해서 시력이 많이 나빠졌던 터였죠. 안경을 몇 차례나 다시 맞췄어요. 안경 없이는 모든 물체가 형체를 잃고 흐릿하게 보였어요. 시력이 나빠지자 신기하게도 귀가 밝아졌어요. 소리만으로도 어떤 눈이 내리는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베갯잇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때문에 깊이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갔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그날은 오랜 탐사로 피곤하기도 했고, 날도 너무 추웠어요.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받아놓고 반신욕을 했어요. 그걸로 모자라서 반신욕이 끝난 후엔 팔팔 끓인 우유에 홍차를 넣어 밀크티를 만들어 마셨어요. 그런데도 추웠어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어요. 전기장판을 틀어놓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엎드려 있는데 어디선가 ‘삑’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처음에는 분명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려 누웠는데 또다시 ‘삑’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삑. 삑. 삑. 삑. 삑.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그리고 밖으로 뛰쳐나갔어요. 삑. 삑. 삑. 자작나무 숲 쪽에서 소리가 들렸어요. 삑. 삑. 삑. 눈이 아직 얼지 않아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이 푹푹 빠졌어요. 무릎까지 쌓인 눈 때문에 빨리 걸을 수가 없었어요. 삑. 삑. 삑. 온 세상이 희뿌옇게 빛나고 있었어요. 보이지 않았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어요. 어느새 석이 아저씨의 뒤를 따라 걸었던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어요. 삑. 삑. 삑. ‘설마… 아닐 거야.’ 하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어요. 내 눈앞에서 흰 눈과 하얀 자작나무가 한데 엉겨붙은 것만 같았어요. 삑. 삑. 삑. 소리가 나는 곳에 이르면 나는 무엇을 보게 될까요. 엄마, 나는 두려웠어요. 삑. 삑. 삑.

그리고 소리가 끊어졌어요.

엄마, 미희가 깨어나기를 기도해주세요. 미희의 심장박동 소리가 그날의 호루라기 소리와 겹쳐서 들려요. 미희는 아직도 그 숲속에서 호루라기를 불고 있는 걸까요?

석이 아저씨의 행방을 알 수가 없어요.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돼 북한으로 이송되었단 소식만 들었어요. 아저씨의 난민증은 발급이 되지 않았다는 걸, 그때는 몰랐어요. 미희는 유엔의 안전가옥까지 갔다가 다시 나를 찾아왔던가 봐요. 야쿠츠크에 오면, 다시 아빠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걸까요? 그날 밤 자작나무 숲에서 그 작은 몸집의 아이가 입술이 부르트도록 호루라기를 불고 있었어요. 자작나무 숲속에서 정신을 잃기 전에, 눈앞이 온통 새하얀 속에서도 미희가 불고 있던 호루라기, 그것만은 선명하게 보였어요.


엄마. 슬픔에 무게가 있다는 얘기, 했었죠. 그날 알았어요. 슬픔은 온도도 지니고 있다는 것을요. 따뜻하고 무거운 슬픔. 미희는 호루라기를 불면서 그 슬픔을 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빠를 왜 잃어야만 했는지, 언제 다시 볼 수 있는지, 누군가 그 아이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미희는 호루라기를 불고, 불고 또 불면서 따뜻하고 무거운 슬픔이 제게서 증발하기를 바랐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엄마, 슬픔은 증발하지 않아요. 끊임없이 순환할 뿐이에요. 그날도, 슬픔 때문에 뜨거워진 공기가 북극까지 가닿았던 게 아닐까요.

엄마, 나는 자꾸만 우리의 슬픔 때문에 북극이 따뜻해진 것만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리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우리가 이 슬픔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요? 우리는 왜 헤어져야만 할까요.

어서 달나라로 가서 살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어요. 그곳에선 우리의 슬픔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요.

엄마. 울지 말아요. 제발 울지 말아요. 이제 괜찮아요.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예요. 아직, 우리의 삶이 끝나지 않았잖아요. 내 옆의 작은 아이의 심장이 아직 뛰고 있어요.

호루라기를 부세요. 우리가 아직 이곳에 있다고, 호루라기를 불어주세요.

김혜인
작 ‘자작나무  숲의  온도’  김혜인  수상  소감


잊지  않겠습니다


김혜인 제공

김혜인 제공

또다시 추운 계절입니다. 찬바람이 불면 잃어버린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뒤에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를 위해 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만나기도 전에 헤어지는 일들, 제대로 된 밥 한 끼 먹이지도 못하고 영영 그리워해야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슬픔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은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는 거라고 믿습니다. ‘잊지 않겠다’는 말을 품고 또 하루를 살아갈 당신께 이 작은 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겨울,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무사히 났으면 좋겠습니다. 모두의 안녕을 바랍니다.
무엇인가를 쓴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늘 두렵고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런 제게 용기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과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간에도 시차가 다른 곳에 사는 자식들을 응원하고 계실 아버님, 어머님, 아빠, 엄마, 늘 따뜻하게 챙겨주는 아가씨, 새로운 곳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선팔이, 그리고 막내 식빵이. 소중한 이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 글의 첫 독자가 되어주고 슬픔을 함께 나눠준 남편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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