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어느 문장에 마음이 박혀 있다.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사랑의 시작이다.”
그 문장을 내 방식으로 옮겨본다. 사랑은 폭발이 아니라 연소다. 첫 불꽃만으로는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다. 오랫동안 불꽃을 태우려면 바람 막고 땔감 대야 한다. 무엇을 얻을지는 알 수 없다. 사랑은 연소의 과정이므로 (모든) 사랑의 끝에 기다리는 것은 한 줌 잿더미 같은 죽음뿐이다. 그러니 사랑에 대한 진짜 질문은 ‘사랑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사랑할 가치가 있는가’이다.
2015년 3월 편집장을 맡은 뒤 나의 세계는 두 영역으로 구성됐다. 과 휴식. 두 가지 모두 사랑했다. 그 밖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일은 ‘이 매체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라는 이름의 깔때기를 거쳤다. 그리고 쉬었다. 이 글도 그러했다.
글쓰기는 쓰고 싶은 것을 찾아가는 일이다. 찾아내지 못하면 글쓰기가 두려워진다. 억지로 써야 할 때도 비슷한 감정에 빠진다. 1년9개월 동안 쓰고 싶은 게 아니라 써야 할 것을 썼다. 독자를 끌어당길 첫 페이지를 채워야 했다. 두려웠다. 문장이 비눗방울처럼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래야 할 가치가 있었다. 이 언론의 미래를 향한 더듬이라고 믿었다.
추적취재를 통한 권력 고발(김현철 게이트·베트남전 양민학살), 다원주의 인권의제 발굴(성소수자·병역거부자), 내러티브 저널리즘(노동 OTL), 데이터·기록 저널리즘(세월호 추적), 공공저널리즘(바글시민 와글입법 프로젝트), 시민 참여 저널리즘(기본소득 실험) 등에 더해, 디자인 중심 편집, 온·오프 통합 콘텐츠에 이르기까지 이 매체는 미래형 미디어를 계속 개척하고 있다. 심지어 토요판과 탐사보도팀의 바탕에 의 실험이 있다고 나는 (아전인수 격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이 둥지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미래를 향한 촉수가 사라지면 기자와 언론은 제자리만 뱅글뱅글 돌지 않겠는가.
사랑이 시작됐으나 지키고 가꾸는 일은 어려웠다. 2015년 3월 이후 1년 동안 매주 판매 부수 감소를 숫자로 확인했다. 추세로 보자면 1년 뒤 문 닫을 상황이었다. 마지막 편집장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혼자 생각했다. 1년이 지나자 감소세가 진정됐다. 이런저런 조직 개편이 자리잡고, 여러 플랫폼에 기사를 선보이면서, 새로운 판매 경로를 개척하던 무렵의 일이었다. 마침내 지난가을부터 지금까지 매주 판매 부수가 늘어나고 있다. 처음 급감하던 기울기만큼 반등했다. 촛불의 영향이 클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만큼 이 매체에 대한 호감이 높아졌을 것이다. (아전인수 격으로 보자면) 기대에 부응하려는 여러 노력에 대한 격려이기도 할 것이다.
2016년 마지막 호를 내면서 허약한 속살을 이렇게 내보인다. 실은 우리, 두려웠다. 끝일까봐 무서웠다. 이제 촛불과 더불어 일어선다. 촛불이 혁명일지 아닐지는 더 가꾼 다음 판단할 일이다. 미디어 혁신도 그러하다. 그동안 우리가 혁신이라고 불렀던 일은 혁신의 시작에 불과했다. 2017년, 촛불이 혁명으로 판가름 날 일을 준비하면서 혁신의 새로운 땔감을 마련하겠다. 시작으로 끝내지 않고 진짜 끝을 보아 그 시작을 빛내겠다. 더 많은 이에게 작지만 결정적인 사랑이 되겠다. 그것이 우리 사랑의 방식이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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