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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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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

등록 2016-10-11 17:13 수정 2020-05-03 04:28

며칠 전, 영화 의 ‘매우 중요한 사람(VIP)’ 시사회에 초대받았다. 대중적 스타라고 할 만한 면면만 꼽아도, 소설가 공지영, 작가 유시민, 교수 조국, 영화감독 변영주, 평론가 허지웅 등이 왔고, 점잖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석태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안경환 전 국가인권위원장,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 김두식 경북대 교수, 권석천 논설위원 등도 조우했다. 인파 속에 미처 인사하지 못한 명사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빛나는 이들과 함께 공짜로 영화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출세한 것 같아 즐겁고 좋았다, 고 적으려니 가슴이 쓰리다. 그렇다. 밴댕이의 속을 그대로 품고 있는 나는 하나도 좋지 않았다. ‘매우 중요한 소비자’보다는 ‘덜 중요하더라도 어쨌든 생산자’가 되는 게 인생의 목표인 것인데, 그걸 먼저 이뤄버린 의 최승호 PD가 질투 나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기사-출판-영화로 이어지는 진정한 ‘원소스 멀티유스 뉴스’의 전범을 그가 먼저 성취해버렸으니, 해직된 처지에 뭐 그리 열성으로 취재해서 후배 언론인들을 이렇게 기죽이는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가 다 이뤘으니 이제 무엇을 목표로 기자 노릇을 계속할지, 갑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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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에서 해직된 최 PD와 그가 몸담고 있는 동료들의 땀이 고스란히 담긴 다큐멘터리영화 은 ‘유우성 간첩 사건’을 뼈대로 박정희 정권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는 국가정보원의 간첩 조작 공작의 실체를 다루고 있다. 특히 기자 또는 기자지망생들이 보면 가슴 뛸 것이다. 비루하고 비겁한 기자의 일상 가운데서도 희귀한 분투를 통해 기적처럼 빛나는 성취를 이룰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나의 시답잖은 강의를 듣다가 이제는 기자가 되어버린 이들과 함께 시사회에 갔는데, 나중에 그들이 물었다. “왜 이런 취재를 다른 기자들은 안 했을까요.” 나를 향한 힐난인 듯해 뜨끔했으나, 짐짓 냉정하게 답했다. “기자 일의 핵심이 ‘검증’이라는 것을 몰라서 그랬겠지.”

언론 본연의 임무가 권력 감시라는 게 사실이라면, 권력자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기자는 믿어선 안 된다. 의심하여 검증하는 것이 모든 취재의 기본이자, 세상을 뒤흔드는 탐사취재의 출발이다. 검증의 과정은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지나치게 단순하여 고되다. 누군가를 만나서 들어보면 된다. 그 간단하고 명료한 일에는 기다리고 설득하고 퇴짜 맞고 모욕당하는 시간이 포함돼 있다. 다만 그것만 견디면 반드시 ‘진실’이 얼굴을 내민다.

이번 가을, 새롭게 에 합류한 진명선, 송채경화, 성연철 기자가 검증을 실천했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둘러싸고 검찰·경찰·서울대병원이 내놓은 주장을 검증하여 단독 보도한다. 그들은 기다리고 설득하여 만나고 듣고 읽었다. 그 죽음에 대해 국가의 사과를 촉구하는 보수 정치인 유승민과 만난 서보미 기자도 오래전에 인터뷰를 제안하고 기다리고 마침내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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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기사를 손질하며 마감을 치르다 문득 알아차렸다. 나는 ‘매우 중요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매일 매주 매달 기자 노릇을 치르고 있다. 그들이 있어 당분간 이 길을 더 가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보다 더 훌륭한 탐사보도 다큐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을 것이다. 기자라면, 검증하라.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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