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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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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5-12-08 18:06 수정 2020-05-03 04:28

옛 거리의 구호는 추상적이었다. 예컨대 ‘노동해방 쟁취하자’는 무엇을 어쩌라는 건지 잘 모르겠는 구호였다. 그나마 구체적인 것으로 ‘정권 타도’가 있었다. 대학 1학년이던 1991년, 아직 군인이 대통령이던 시절, 그것은 피를 끓게 만드는 구호였다. 미운 사람이 선연히 그려졌다.

두 달여 만에 10명이 맞아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그해, 내 고민은 민주·자유·해방에 가닿지 않았다. 오직 폭력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날 교문 앞 집회 대열을 경찰이 뭉갰다. 인도 구석에 몰린 우리에게 백골단은 주먹 크기의 사과탄을 툭툭툭툭 까 던졌다. 파편에 맞아 이마에 피가 나는데, 머리를 들면 발로 걷어채었다. 머리 숙이면 최루가스에 숨이 막혔다. 그런 현장에서 명지대생 강경대와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죽었다.

그다음부터 쇠파이프를 들었다. ‘집회 참가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은 죽을까봐 무서워 그랬다. 그래놓고는 밤마다 몸을 떨었다. 쇠파이프가 경찰의 곤봉과 무엇이 다른가. 풀리지 않는 고민으로 전전반측했다.

번민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풀렸다. 캠퍼스를 찾아온 정원식 당시 국무총리에게 대학생들이 밀가루를 뿌렸다. 검경은 불온·과격·용공으로 그들을 몰아 감옥에 처넣었다. 아, 밀가루가 폭력이라면 최루탄·물대포·방패·곤봉·발길질은 도대체 뭐라 불러야 할까. 그때 알아차렸다. 가장 강력한 폭력은 무엇이 폭력인지 정의 내리는 배타적 힘이다. 곤봉이 아니라 밀가루가 폭력이라 말하는 그 힘이 폭력이다.

25년이 흐른 요즘 거리의 구호는 구체적이다. ‘정책적’ 구호가 등장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노동법 개악 반대 등은 정책 쟁점이다. 국회가 정말 작동한다면, 10만여 명이 추운 겨울 거리에 모여 고작 ‘정책적’ 구호를 외치며 씩씩거릴 일은 없을 테다.

그렇게 거리의 구호는 ‘해방 쟁취’에서 ‘정책 반대’로 바뀌었는데, 저들은 25년 전과 똑같다. 의기양양하다. 밀가루를 트집 잡았고, 이제는 복면을 빌미 삼는다. 촛불까지 폭력시위용품으로 처벌할 기세다. 그쯤 되면 기가 막힌 세상이 다 된 것이다.

집회·시위는 대의정치가 반영하지 못하는 ‘비의회적’ 쟁점을 주로 소통시키는 장치다. 의회정치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므로 헌법적 권리가 됐다. 이 나라가 정상적 민주국가라면, 2015년 집회·시위의 주역은 기성 정당으로는 대표되지 않는 이주노동자 또는 트랜스젠더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여전히 노동자·농민·학생이 10만여 명씩 거리로 나온다. 이 나라가 20세기 중반에 머물러 있음을, 체제전복의 구호가 사라졌어도 정책 대의기능은 마련되지 않았음을, 대통령은 물론 야당도 그 해결에 아무 능력이 없음을, 여전히 곤봉으로 때려잡을 궁리만 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민주주의가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 지경이 됐어도 왜 더 많은 사람이 분노하여 행동하지 않는가. 기대와 달리, 많은 사람들은 정의를 믿지 않는다. 대신 힘을 믿는다. 그들이 침묵하는 것은 정의를 저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일상을 지탱하는 것은 정의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힘에 대한 복종임을 그들, 특히 힘없는 이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1991년 봄은 권력을 타도하지 못했고, 보수대연합의 민자당은 오늘의 새누리당에 이른다.

구호만으로는 민주주의를 재가동할 수 없다. 정의를 설파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정의로운 자들도 힘이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이번호에서 박수진 기자가 ‘루미오’(▶관련기사 '호모 모빌리쿠스의 정치 실험')를 소개한다. 디지털에 기초한 직접민주주의의 성공 사례가 한국에선 드물다. 여기서 ‘성공’이란 권력을 바꾸는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야당이 하지 않는 일을 누군가 시작해야 한다. 좋은 권력을 도모할 때가 왔다. 더는 못 참겠지 않는가 말이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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